감각의 밸브 3
20 특정 인물의 이미지 말입니까?
네.
하지만 과거에는 그러한 경향이 미약하지 않았습니까?
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경향이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오직 그러한 방식에 기반을 두어야만 만들고자 하는 명확한 이미지를 특별히 비이성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하면 이미지를 가장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단지 이미지의 외관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감각의 전 영역을 다시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다양한 수준의 감각을 열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순수한 삽화, 순전히 구상적인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분명히 실현되었으니까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말입니다. 물론 벨라스케스는 렘브란트는 매우 다릅니다. 아주 묘하게도 램브란트가 생애 말년에 그린 뛰어난 자화상들을 보면 얼굴의 모든 윤곽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외관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얼굴입니다. 이 차이점이 보는 이로 하여금 다른 감정에 말려들게 합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경우 그것은 보다 조절되어 있고, 따라서 내가 보기에는 더 놀랍습니다. 벼랑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것과 같은 이런 작업을 원하기 때문에,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소위 삽화에 매우 근접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크고 깊은 것들을 활짝 열어 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별해 보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대단히 신비로운 화가인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벨라스케스가 당시의 왕실을 기록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볼 때 당시 상황과 매우 근접한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때 이후로 모든 여건이 왜곡되고 제거되었지만 나는 우리가 보다 자의적인 방법을 통해 그와 매우 유사한 작업 방식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벨라스케스처럼 구체적이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벨라스케스 이래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에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습니다. 그중 실제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지 문제는 왜 사진이 구상화의 모든 것을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바꾸었는가 하는 점입니다.(정육점 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