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과 책임
당신은 '객관성이란 망상이다. 관찰은 관찰자 없이 행해질 수 없다. 객관성에 대한 호소는 책임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객관성이 선호된다.'라고 썼습니다. 책임을 거부하는 것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것은 서로 어떻게 관련되나요?
과학적 활동을 하고 수학적 이론을 수립하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찰이 무엇인가? 관찰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사실임이, 사물의 이런 관점 아니면 저런 관점이 타당함이 어떻게 확실히 결저되는가'하는 질문들이 중요합니다. 고전적인 경험의 문제에서 출발해서 헤르만 폰 헬름홀츠라는 사람이 19세기에 자기가 볼 때 보편타당한 관찰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어떤 전략을 개발했습니다. 헬름홀츠는 관찰자를 소위 관찰의 위치 즉 뭔가를 조사 연구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영향, 개인적 취향, 특이한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전적으로 중립적인 관찰의 장소에 위치 지웠습니다.
관찰의 위치의 특징은 마치 완전한 인식이론적 중립성의 장소로서 인식론적 스위스(중립국가 스위스)를 기술하는 듯하군요.
훌륭하군요. 인식론적 스위스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견해들을 객관적인 것으로 내놓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객관성이라는 개념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 본다면 관찰자의 개인적인 속성이 관찰내용을 기술하는데 개입되지 않고, 기술에 영향을 주지도 않고 규정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객관적 서술의 특징임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눈을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까? 듣지도 않고 냄새도 맡지도 않고 맛보지도 않아야 합니꺄? 객관성 요구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개인적 시야를 거부하면서 도대체 뭘 관찰하려는 건지 제게는 결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객관성에 대한 그러한 정의를 따를 경우 눈멀고 귀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관찰자들이, 또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금지된 그런 관찰자들이 무엇을 지각해야 할까요? 그런 관찰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줘야 합니까? 그는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나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관찰하는 것은 항상 관찰자라고.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고.
그런데 객관성 개념에 대한 그런 이야기가 실천적 결과인 '책임으로부터의 작별'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제가 어떤 진술이 객관적이다 라고 말하면 이러한 주장에는 우리 자신은 그 진술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기술할 뿐, 우리는 일종의 사진기로서 그리고 수동적인 기록원이르로서 기능할 뿐이라는 거죠 정치적으로 보면 관찰되는 것으로부터 관찰자를 그렇게 분리시키는 건 애용되는 사회적 유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객관적 관찰자에는 뭔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찰자는 통신원에 지나지 않고 자신이 일어난 일에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사실인 것을 다만 객관적으로 기술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발을 뺄 수 있습니다. (발명품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