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통(횡단)학

업 또한 공하다.

T1000.0 2013. 1. 21. 12:52

우리들의 삶을 봅시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그 낱낱의 사건들이 현실입니다. 이 현실의 삶, 곧 개인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사건들에 대해 그 본질을 잘 알지 못하면서 욕심내거나 성내는 삶이 우리에게 불만족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크게 보면 그것은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현실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을 규정하고 있는 마음이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이 마음의 주인은 자아의식입니다. 불만족[苦]의 주인은 인생이 아니라 인생을 잘못 아는 자아의식이 삶의 근거[集]가 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삶 자체가 괴로움이 아니라 삶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불만족이 일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불만족과 불만족의 원인을 없애고자 여러가지 가르침을 펼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의 실천수행이 근본이니 곧 불만족을 없애는 이루는 선정 수행과 삶의 여실한 실상을 보게하는 지혜수행이 그것입니다. 선정과 지혜수행을 함께 완성해야만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생사의 괴로움을 면할 뿐인 선정수행만으로는 생사의 근본 실상을 볼수 없고 선정에서 깨어났을 때 다시 생사의 괴로움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선정수행만으로는 생사란 본디 자아의식이 주인을 이루는 중생의 마음에 의해서 되풀이 되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게 된 데서 불만족이 일어남을 모를 뿐만 아니라, 불생불멸의 생사가 삶의 본디 모습이며 그 자체로 모든 법들을 창조하고 있는, 나눌 수 없는 한 세계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도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선정체험인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선정조차 초월하여 거친 번뇌는 다 없어졌으나[非想] 아직 미세망상이 남아있는[非非想]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완전히 이루고서도 괴로움을 완전히 없앨 수 없었고,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인 집착, 곧 자아의식에 의해서 일어나는 생사의 모습을 여실히 지켜보는 염처염처수행을 통하여 괴로움을 완전히 없앴던 경험에 따른 것입니다. 그 결과 괴로움의 원인은 생사에 있지 않고 생사를 잘못 아는 데에 있음을 여실히 알고 나서 삶의 실상인 연기법의 가르침을 펴시게 됐습니다.(<법성게> p165)

 

T1000.0 : <에티카>에선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힘을 '코나투스[각주:1]'라고 하는데, 이 코나투스는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업'이다. 업은 죽는 것을 싫어하고[嗔心] 사는 것을 좋아하는[貪心] 경향성을 가진다. 업은 생명활동에 대한 인식이며 이를 통해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생기고 이가운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주체가 세워진다. 그러나 업이 자아는 아니며 인연을 따라 축적된 경향성, 지속하려는 힘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이 경향성이 없는 나를 세우고 나의 것에 집착하게 됨으로써 본래 없는 나로부터 멀리갈수록 소외되고, 괴로움이 커져 인생을 고苦로 보게된다. 그러나 인생은 고가 아니며 인생을 규정하는 마음인 나와 나의 것을 고집하는 자아의식, 즉 업을 자아로 삼는 것에 고의 원인이 있다. 때문에 업의 경향성을, 또는 업의 힘을 자아를 세우는데, 자기 것을 고집하는데 향하지 않고 삶의 흐름대로 향하도록 삶과 한방향을 이루도록 한다면 업은 삶 그자체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업을, 선업은 짓고 악업은 그침으로써 본래면목의 흐름과 나의 업의 흐름이 한방향이 되도록 두눈 밝혀 지켜볼 것이다.       

 

 

  1. <에티카> 제3부 정리7.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코나투스는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