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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4.

T1000.0 2021. 3. 1. 19:59

보다 격렬하게 보다 통렬하게

1. 십자가 책형의 발치에 있는 세 개의 형태를 처으믕로 그려 본 이후에 형태를 다루어 보고자 하는 욕구가 일었습니다. 그 형태는 피카소의 1920년대 말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시기 피카소의 작품에는 그가 제시한 엄청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탐구되지 않은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이미지와 관계는 있지만 그 이미지를 완벽하게 왜곡한 유기적 형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95)

2. 글쎄요. 1946년에 그린 그림 중 정육점을 연상시키는 작품은 내게 우연히 다가왔습니다. 나는 들판에 내려앉는 새 한 마리를 그리려던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이전의 세 가지 형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린 선들이 갑자기 전혀 다른 것을 제시해 주었고 그로부터 그 작품이 생겨난 겁니다. 내게는 그 작품을 그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그 그림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우연이 계속 겹치면서 이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내려앉는 새가 우산 또는 다른 것을 암시해 주었습니까?

그것이 별안간 전혀 다른 감각 영역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나는 그 이미지들을 만들었고, 서서히 그려 나갔습니다. 따라서 새가 우산을 암시해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것은 홀연히 이미지 전체를 암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아주 재빨리, 거의 사나흘 만에 화면에 옮겼습니다. (99)

3. 그런 식의 이미지 변형이 작업 중에 자주 일어납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변형이 보다 긍정적으로 일어나기를 늘 바랍니다. 지금은 삽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적으로 비논리적인 것으로부터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매우 구체적인 대상을 다루길 원합니다. 나는 초상화 같은 대단히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 그림은 사람의 초상화일 테지만, 분석하려 들면 그 이미지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거나 알아보기가 매우 힘들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분석을 매우 피곤하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정말이지 전적으로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연이라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죠. 최근에 어떤 사람의 머리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분석해 보면 눈구멍과 코, 입을 구성하는 것은 눈, 코, 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형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윤곽선 사이를 오가는 물감이 내가 그리고자 하는 그 사람과의 유사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나는 잠시 멈추었고 내가 원하는 바에 보다 더 근접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날 작업을 더 진행하여 보다 통렬하고 나의 바람에 더욱 근접하게 만들고자 노력했지요. 그러고는 이미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위 구상과 추상 사이의 일종의 줄타기 곡예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는 추상으로부터 전개되어 나갈 테지만 실상 추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다 격렬하고도 통렬하게 구상을 신경계로 불러오려는 시도입니다.
(101)

4. 색이 없는 어둠 속에서 이미지들을 훨씬 더 통렬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게 된 이유도 기억합니까?

그저 지루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림이 보다 어두워지면서 형태는 명확성이 줄어들고 더 흐릿해졌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형태를 잃어버리기가 더 쉽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101)

5. 최근에 그린 일부 작품들의 경우 당신은 선명한 바탕색을 사용하면서 초기 삼면화에서 보여 주었던 분명하고 조각적인 형태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신작 삼면화 '십자가 책형' 중 오른쪽 패녈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이제는 형태를 보다 명확하고 정확하게 만들려는 일반적인 욕구를 갖게 된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보다 명확하고 정확할수록 좋습니다. 물론 그걸 구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모든 화가들, 또는 적어도 주제나 구상적인 이미지에 몰두하는 화가들에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단지 형태를 보다 더 분명하게 만들기를 원합니다만, 그것은 매우 모호한 정확성일 따름입니다. (103)

6. 하나씩 따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점차 작품을 완성해 가면서 작업실을 가로지르며 세 캔버스를 동시에 그렸습니다. 작품을 완성하는 데 대략 2주일이 결렸습니다. 술에 취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엄청난 음주와 숙취 속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 그림은 내가 술에 취한 채 그릴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아마도 술이 나를 보다 자유롭게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같은 방식으로 그린 작품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나 자신을 보다 자유롭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은 약을 통해서든 술을 통해서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극도의 권태감을 통해서는요?

극도의 권태감요? 아마도요. 또는 의지이겠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할 의지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그건 자신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 입니다. 의지란 궁극적으로는 절망이라 부를 수 있기에 잘못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전히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느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105)

7. 애초에 정한 대로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형상은 계속해서 바뀌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죽 살폈습니다. 오른쪽 패널의 형상은 내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치마부에의 훌륭한 작품 '십자가의 책형'을 아시죠? 나는 늘 그 작품에서 십자가를 기어 내려오는 벌레의 이미지를 봅니다. 나는 십자가를 따라 아래로 움직이는, 구불거리는 이미지의 그 작품에서 가끔씩 받았던 느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그 이미지는 당신이 사용한 다양한 기존의 이미지들 중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존의 이미지들은 내게 다른 이미지들을 여럿 제공해 줍니다. 물론 나는 그것들을 새롭게 만들고자 합니다. (107)

8. 아시다시피 내 경우는 모든 그림이 우연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향이 보다 짙어집니다. 따라서 마음속으로 예상은 합니다만 그대로 진행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그림은 물감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왜곡됩니다. 나는 아주 넓은 붓을 사용하는데, 내가 작업하는 방식으로는 종종 물감이 어떻게 작용할지를 알 수 없습니다. 물감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능가하는 뛰어난 작용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우연 중에서 어떤 것들을 보존할지 결정하는 것은 선택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우연의 활력을 간직하면서 연속성을 지키고자 합니다. (107)

9.물감을 통해 발생하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물감이 낳는 일종의 모호함을 말하는 건가요?

거기에는 암시도 있습니다. 일전에 절망에 빠져 어떤 사람의 머리를 그리고 있었을 때 나는 아주 큰 붓과 많은 양의 물감을 사용하여 매우 자유롭게 채색했습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였죠. 그런데 갑자기 이미지가 분명해졌고, 정확히 내가 기록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같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떻나 의도를 지닌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삽화적인 그림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특별한 작업 장식이 왜 삽화보다 더 통렬한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분석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림이 온전히 자기만의 삶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덫을 놓아 잡고자 하는 이미지처럼 독립적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자력으로 살기 때문에 이미지의 본질을 보다 통렬하게 전달합니다. 따라서 미술가가 감각의 밸브를 열어 보는 이를 보다 맹렬하게 삶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이미지가 분명해졌다고 느낄 때 그건 당신이 애초에 원했던 바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원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던 것이 주어졌다는 의미인가요?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우연적인 것을 통해서 실제로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무언가를 얻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109)

10, 내 생각에 더 나은 그림 또는 어느 정도까지는 좋았던 그림을 파괴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같습니다. 좀 더 노력을 기울여 진척시키려고 하다가 그림이 그 특성을 모조리 잃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뵤. 나는 더 나은 그림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림이 일단 한계를 넘어서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겁니까?

현재로서는요. 점점 더 그럴 테고요. 이제는 나의 작업 방식이 전적으로 우연적인 데다 더욱더 우연적으로 진행되어, 말하자면 우연적이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우연을 되살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110)

11. 나는 두껍게 채색한 물감과 얇게 채색한 물감 사이를 오가면서 작업합니다. 그림의 어떤 부분은 아주 얇지만 어떤 부분은 아주 두꼅습니다. 그림이 막히면 삽화적인 방식으로 물감을 칠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뭔가요?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물감과 삽화를 통해 전달하는 물감의 차이를 분석할 수 있습니까? 말로 설명하기에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그것은 본능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 어떤 물감은 신경계로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어떤 물감은 뇌를 통한 긴 판단 과정을 거쳐 이야기를 전달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매우 비밀스럽고 어렵습니다. (111)

12. 그리던 캔버스를 벽으로 돌려놓았다가 몇 주, 몇 달이 지난 다음에 다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것은 나를 잠재우는 효과가 있습니다. 나는 결코 작품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작업을 시도하고, 완성한 다음에는 가능한 한 빨리 작업실에서 내보내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실은 매우 나쁜 일이지요.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와서 그 작품들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어떤 작품도 작업실 밖을 ㅗ떠나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당신은 그 작품들을 게속 그리다가 결국 모두 파괴해 버리게 되겠군요.

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113)

13.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긍정적인 욕망이 있습니까? 작품을 결코 공개하지 않을지 여부는 당신엑 ㅔ중요한 문제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비판을 통해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아주 드뭅니다. 어쨌든 살마들이 내 작품을 좋아해 준다면 나는 아주 기쁠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115)

14.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좋았는데 파괴해 버린 작품들에 대해 후회합니까? 그 작품들을 다시 보고 싶습니까?

한두 점가량 있습니다. 다시 본다면 아주 기쁠 작품이 몇 점 있긴 합니다. 그 작품들이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다시 포착할 수 없었던 기억의 자취를 내게 남긴다는 점입니다.

그 작품들을 다시 그려 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습니까?

네, 시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스케치나 드로잉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작품을 위해 습작을 하지도 않지요?

종종 그래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하지는 않습니다. 내 작품과 같은 경우에는 그런 방식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실질적으로 질감과 색채, 물감이 움직이는 모든 자취가 매우 우연적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스케치를 그리건 간에 작품이 진행될 방식에 대한 뼈대 정도만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겁니다. (115)

15. 당신은 많은 작품을 연작으로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모든 이미지를 변화하는 방식에 따라, 즉 대부분의 경우 변화하는 연속장면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소 평범한 형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아주 먼 지점까지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연작을 작업할 때 하나씩 차례대로 그립니까, 아니면 동시에 그립니까?

차례대로 그립니다. 작품은 차례대로 그다음 작품을 암시해 줍니다.(117)

16. 이상적으로 말하면, 각기 다른 주제를 갖고 있지만 연작으로 간주되는 그림들로 이루어진 방을 그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림으로 가득한 방을 상상합니다. 그림들이 슬라이드처럼 떠오르지요. 나는 하루 종일 공상에 잠겨 그림으로 가득 찬 방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그것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항상 은밀하게 바라는 바는 다른 모든 것들을 절멸시킬 그림을 그리는 것,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한 작품에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연작에서 한 작품은 다른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때로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연작을 이룰 때가 더 낫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다른 모든 것들을 압축해서 보여 줄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다른 이미지와 대비되는 이미지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17)

17. 대부분의 작품은 단일 형상이나 머리를 다룹니다. 그런데 새로 그린 삼면화 '십자가 책형'은 여러 형상이 등장하는 구성을 보여 줍니다. 이런 구성을 앞으로 더 자주 사용할 계획입니까?

자족적인 하나의 형상을 그리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에 대한 집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 단일한 형상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오늘날 그림이 처한 복잡한 상황에서는 복수의 형상이 존재하는 바로 그 순간, 다시 말해 한 캔버스 위에 복수의 형상이 존재하면 이야기가 정교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정교해지자마자 지루함이 자리를 잡습니다. 이야기가 물감보다 소리를 높입니다. 이는 사실 우리가 또다시 매우 미개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 사이에서 엮이는 이야기를 무효화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책형'에서 이야기를 찾아내려 시도해 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형상들 사이에 관계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공간의 틀 안에 머리나 형상을 그린 경우와 동일하군요. 이런 유형의 그림들은 유리상자 안에 갇힌 누군가를 그린 것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나는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 그와 같은 틀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나는 그 장치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리 상자 안에 있었을 때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이 그 이미지를 예견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지를 직사각형 안에 응축시켜 그림으로써 캔버스의 크기를 줄였습니다. 그건 단지 더 나아 보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어떠한 삽화적인 의도도 담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군요. 마이크와 함께 머리를 그린 1949년 작품도 그렇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저 얼굴과 마이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게 특별히 만족스러운 장치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가끔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삼면화에세 각 캔버스 사이의 간격은 캔버스 안의 틀과 동일한 목적을 지닙니까?

네, 맞습니다. 그 간격이 각각의 캔버스를 별개로 분리하고 캔버스 사이의 이야기를 단절시킵니다. 세 캔버스에 각각 형상이 그려진 경우 그 간격은 이야기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물론 뛰어난 걸작 중 다수의 그림이 한 화면 안에 여러 형상을 담고 있고, 모든 화가들이 그런 그림을 그리길 갈망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림이 대단히 복잡한 국면에 놓여 있기 때문에 형상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물감 자체가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쇄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누군가 나타나서 캔버스 위에 다수의 형상을 배치할 수 있을 겁니다.(121)

18. 당신은 이야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십자가 책형과 같은 주제를 선택할 때에는 분명 극적인 자극이 풍부한 주제를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유로 그런 삼면화를 그리게 되었습니까?

나는 도살장과 고깃덩어리를 그린 그림에 늘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게는 그것이 십자가 책형이 가진 의미의 전부입니다. 가축이 도축되기 전에 찍은 기이한 사진들이 있습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사진들이죠. 물론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그 사진들을 보면 사진 속 동물들은 자신에게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동물들은 갖은 노력을 다해 도망가려고 합니다. 나는 그 그림들이 이와 같은 것들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것이 온전히 십자가 책형에 매우 근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 기독교인들에게는 십자가 책형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지만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그것은 단지 인간의 행동,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행동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121)

19. 교황을 그린 그림은 종교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것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찍은 사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작업입니다.

왜 그 사진을 선택했습니까?

왜냐하면 벨라스케스의 그 작품이 지급까지 제작된 가장 뛰어난 초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그림에 매료되었습니다. 나는 그 작품의 도판이 담긴 책을 하나씩 구입합니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뵤. 그 작품은 내게 온갖 종류의 느낌과 내가 말하려던 상상의 영역까지도 열어 줍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매료될 만큼 훌륭한 벨라스케스의 다른 초상화들도 있지 않습니까? 초상화의 주제가 교황이라는 사실이 당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확신합니까?

나는 그 그림의 멋진 색채 때문에 매혹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23)

 
20 특정 인물의 이미지 말입니까?

네.

하지만 과거에는 그러한 경향이 미약하지 않았습니까?

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경향이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오직 그러한 방식에 기반을 두어야만 만들고자 하는 명확한 이미지를 특별히 비이성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하면 이미지를 가장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단지 이미지의 외관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감각의 전 영역을 다시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다양한 수준의 감각을 열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순수한 삽화, 순전히 구상적인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분명히 실현되었으니까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말입니다. 물론 벨라스케스는 렘브란트는 매우 다릅니다. 아주 묘하게도 램브란트가 생애 말년에 그린 뛰어난 자화상들을 보면 얼굴의 모든 윤곽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외관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얼굴입니다. 이 차이점이 보는 이로 하여금 다른 감정에 말려들게 합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경우 그것은 보다 조절되어 있고, 따라서 내가 보기에는 더 놀랍습니다. 벼랑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것과 같은 이런 작업을 원하기 때문에,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소위 삽화에 매우 근접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크고 깊은 것들을 활짝 열어 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별해 보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대단히 신비로운 화가인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벨라스케스가 당시의 왕실을 기록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볼 때 당시 상황과 매우 근접한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때 이후로 모든 여건이 왜곡되고 제거되었지만 나는 우리가 보다 자의적인 방법을 통해 그와 매우 유사한 작업 방식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벨라스케스처럼 구체적이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벨라스케스 이래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에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습니다. 그중 실제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지 문제는 왜 사진이 구상화의 모든 것을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바꾸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부정적인 만큼이나 긍정적인 방식으로 말입니까?

나는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벨라스케스 자신이 당시의 왕실과 특정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믿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훌륭한 미술가는 그와 같은 상황을 무시하라는 압력을 받을 것입니다. 영상 필름을 통해 기록이 가능하기에 그는 자신의 활동 중 기록의 측면은 다른 것이 장약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이 몰두하는 바는 이미지를 통해 감각을 열어 주는 것뿐이라는 점도 압니다. 또한 나는 이제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의 우연이고 전적으로 무상한 존재이며 이유 없이 삶이라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그릴 때에도,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릴 때에도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어떠했든지 간에 그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종교적인 가능성에 의해 얼마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종교적 가능성이 완전히 무효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 방식에 따라 잠시나마 스스로를 기만하며 즐겁게 만들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리고 의사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연장함으로써 매우 긍정적인 것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제 모든 예술은 사람들이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게임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흥미로운 것은 미술가에게 미술이 훨씬 더 어려워질 거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그는 그 게임을 정말로 심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