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5

생각의 도화선
1.나는 사람의 외관에 대한 감각이 항상 사진과 영상에 의해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무엇을 볼 때 그 사람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사진과 영상이 그 대상에 가한 폭력을 통해서도 봅니다. 나는 사진이 추상화나 구상화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언제난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특히 사진의 어떤 점이 당신을 사로잡습니까? 그 직접성인가요? 사진에서 나타나는 놀라운 형태? 아니면 질감입니까?
내 생각에는 사진이 사실로부터 갖는 약간의 거리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 사실로 보다 격렬하게 되돌아가게 합니다. 나는 대상을 바라 볼 때보다 사진 이미지를 통해 더 깊이 이미지 내부로 침투하여 실재라고 생각하는 바를 열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단순히 참고자료가 아닙니다. 사진은 종종 생각의 도화선이 됩니다. (133)
2.당신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사진을 가장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네. 그 사진들은 인간의 행위를 기록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죠. 연작 형식으로 작업하는 것은 아마도 연속 사진으로 움직임의 단계들을 보여 주는 머이브리지의 책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또한 나는 늘 <엑스선 사진에서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엑스선 촬영을 위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체를 찍은 상당수의 사진과 엑스선 사진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39)
3. 언젠가 당신이 초상화 모델을 섰을 때 내가 늘 야생 동물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대단히 많은 암시를 줄 수 있습니다. 당시에 나는 질감이 훨씬 더 두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를 들면 코뿔소 피부의 질감이 사람 피부의 질감에 대해 생각하는데 도움을 줄 거라고 봤습니다. (139)
4. <전함 포템킨>은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본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오데사의 계단' 장면을 비롯하여 영화 전체가 그랬습니다. 나는 한때 그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심리적 의미르 지닌 시도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의 비명을 그린 최고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그림을 그릴 수 없었죠.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속 장면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림에서는 니콜라 푸생이 사림의 비명을 가장 뛰어나게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영아 대학살'말입니까?
맞습니다. 샹티이에 있는 그 작품이빈다. 나는 그곳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한 집에서 약 3개월 동안 머물며 프랑스어를 배웠습니다. 나는 샹티이에 자주 갔고, 그 작품은 늘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비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 또 다른 계기는 아주 어렸을 때 파리의 책방에서 구입한 책 때문입니다. 구강 질병에 대한 헌책이었는데 손으로 그린 아름다운 삽화가 있었습니다. 벌린 입과 그 내부를 관찰한 아름다운 도판이었죠. 나는 그것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영화 <전함 포템킨>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즘에는 영화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영화의 스틸을 기초로 삼고 사람의 입을 그린 훌륭한 삽화들도 함께 사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141)
5. 나는 항상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왔고, 그에 대한 애착으로 그 작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에 대한 특정한 기록, 왜곡시킨 기록을 만드는 데는 크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후회스럽습니다.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143)
6. 내셔널 갤러리에 가는 것보다는 방에서 사본을 찾는 것이 당연히 훨씬 쉽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그 작품을 보기 위해 내셔널 갤러리에 자주 갑니다. 첫 번째 이유는 색체를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방의 사방에 렘브란트의 작품을 걸어 둘 수 있다면 내셔널 갤러리에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방에 렘브란트의 작품을 걸어 두고 싶습니까?
물론입니다. 내가 그림을 갖고 싶어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긴 하지만 레브란트의 작품은 갖고 싶습니다. (145)
7.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손을 대고 난 뒤에 그 실물을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훌륭한 그림을 보고 나면 그 작품을 활용해 형편 없는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웠으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잘못 추측한 거군요. 나는 당신이 덜 분명하고 보다 암시적이어서 원본보다 사진을 더 선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가진 사진들은 사람들이발로 밟거나 구겨서 크게 훼손된 것들입니다. 그런 경우 예를 들면 렘브란트 작품의 이미지에 다른 의미들을 더해 주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렘브란트의 작품이 아니게 됩니다. (146)
8. 맞습니다. 직접 모델을 서려는 친구들이 있어도 나는 초상화를 위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실물 모델보다는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진만 가지고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고, 또 사진을 갖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작업실에서 실물을 보는 것보다 사진을 사용할 때 작업이 보다 수월합니다. 만약 작업실에 실물이 있다면 내가 사진 이미지를 통해 그리는 것처럼 작업이 자유롭게 흘러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나의 과민한 느김일지도 모르지만 기억과 사진을 통해서 작업하는 것이 눈앞에 실제 대상을 놓고 작업하는 것보다 제약을 덜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까?
완전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상 인물에 대한 기억과 함께 말입니다.( 147)
9. 기억이 보다 흥미롭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눈앞에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 방해가 되기 때문인가요?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은 겉으로 보이는 외관을 크게 넘어서서 대상을 일그러뜨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왜곡은 다시 외관의 기록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림은 대상 인물을 다시 상기키시는 방식에 가깝다는, 그러니까 그리는 과정은 기억해 내는 과정에 가깝다는 뜻입니까?
네, 맞습니다. 이런 작업이 진행되는 방식은 대단히 인위적인데, 내 경우에는 눈앞에 존재하는 모델이 외관을 상기시킬 수 있는 그 인위성을 방해합니다.(147)
10. 이미 기억과 사진을 통해 여러 차례 그렸던 사람이 모델이 된다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내게 제약을 가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을 앞에 둔 채로 작품 속에서 그에게 가하는 폭력을 행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방해가 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폭력을 행하고 싶습니다. 그 폭력을 통해서 나는 그들의 실재를 보다 분명하게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폭력입니까?
사람들, 적어도 단순한 사람들은 자신을 왜곡하는 것이 자신을 향한 폭력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그것에 대해 얼마만큼 동감하는지, 작가를 얼마만큼 좋아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들의 본능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점을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느 누가 이미지에 깊은 상처를 내지 않고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을 사실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151)
11. 당신은 하나의 임미지에서 다양한 수준의 감각을 기록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적대감을 동시에 표현할 수도 있다고, 즉 당신이 만드는 것이 애무이면서 동시에 폭력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너무 논리적인 생각입니다. 나는 작업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의 작업은 보다 깊숙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이미지를 내게 보다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이것이 전부입니다.
12. 내가 볼 때 때때로 이미지를 보다 폭력적으로 인도하는 왜곡이 훼손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훼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미지를 삽화 수준에서 놓고 본다면 왜곡을 훼손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내가 미술이라고 간주하는 수준에서 고려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화가는 삶에 대한 감각과 느낌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나로서는 그리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첨예한 지점에 그것을 도출해 냅니다. (153)
13. 비극적인 미술을 시도하고 창조하고자 합니까?
물론 아닙니다. 아이스킬로스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지닌 장엄함과 그 쇠퇴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는 오늘날에 유효한 신화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든 미술가들이 그러하듯 전통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는 특정 상황에 대한 느낌을 자신의 신경계에 최대한 접근하여 기록하는 것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아마도 나는 풍요와 결핍 사이의, 또는 힘과 그와 반대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원하는 사람 중 한 명일 겁니다. (153)
14. 당신은 위대한 전통을 지닌 신화적이고 비극적인 주제를 자주 그려 왔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책형입니다.
유럽 미술에는 예수의 십자가 책형을 그린 뛰어난 작품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그 주제는 모든 느낌과 감각을 덧불일 수 있는 멋진 갑옷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종교적인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 책형을 주제로 택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종교적 신앙의 문제와는 전혀 무관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책형을 다룬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들의 경우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린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153)
15. 그렇지만 그 작품들은 기독교 문화의 한 부분으로 그려졌고 신자들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네, 그건 사실입니다. 불만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감각과 행위의 특정 영역을 다루는 데 있어서 십자가 책형만큼 도움이 되는 다른 주제를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특별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그와 같은 갑옷을 만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지 생각해 내기 힘들군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수준의 감각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155)
16. 글쎄요. 그리스 신화는 기독교보다 우리와 거리가 훨씬 더 멀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책형과 관련된 한 가지 요소는 주인공인 예수가 매우 분명하고도 고립된 자세로 들어올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이는 동일한 높이에 모든 인물들을 배치하는 것보다 더 큰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내 견해로는 높이의 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155)
17.네, 십자가 책형에서는 나 자신의 느낌과 감각을 다룹니다. 거의 자화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행위와 삶에 대한 다양하고 매우 개인적인 느낌을 다룹니다.
당신의 작품에서 자주 반복되는 구성 방식은 십자가 책형의 이미지와 정육점의 이미지의 결합입니다. 고깃덩어리와의 결부는 분명 당신에게 많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큰 정육점에 가서 그 거대한 죽음의 공간을 지나가면 고기와 생선, 조류 등 모든 것이 죽어서 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가로서 그곳의 아름다운 색을 떠올리게 됩니다. (157)
18. 고깃덩어리와 십자가 책형의 결합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고깃덩어리의 단면을 담은 장면에서 십자가 책형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인물을 매달려 있는 사체로 변형하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고깃덩어리이고 잠재적인 시체입니다. 정육점에 가면 동물 대신 내가 그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외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렇지만 고깃덩어리를 그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척추를 사용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엑스선 사진을 통해 이미지를 끊임없이 봅니다. 그것은 분명히 인체를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을 바꿉니다. 당신은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에드가르 드가의 아름다운 파스텔화를 알고 있을 겁니다. 등을 닦고 있는 여인을 그린 그림인데, 등의 제일 끝부분에서 척추가 피부로부터 튀어나오다시피 한 것을 발견할 수 있지요. 그와 같은 움켜쥠과 비틀기는 척추를 목까지 자연스럽게 그린 경우보다 나머지 신체의 취약함을 보다 잘 깨닫게 합니다. 드가가 척추를 꺾어 표현함으로써 척추가 살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드가의 의도였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는 작품을 훨씬 더 뛰어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불현듯 살뿐만 아니라 척추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드가가 대게 척추뼈를 덮어 버리고 그렸습니다. 나의 경우에 이런 부분은 확실히 엑스선 사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159)

19. 비평가들은 확실히 공포를 항상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 작품에서 특별히 공포스러운 면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결코 무시무시하게 보이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작품 중 어떤 것도 삶의 공포스러운 면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들을 관찰한 다음에 그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살피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사는 삶에 깃든 모든 공포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비평은 투우를 두고 내뱉는 어리석은 말들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투우에 대해서 항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털 위에 모피와 새털을 두른 채 투우장에 입장을 하고서는 투우에 대해 항의하죠. (161)
20. 방에 사람이 홀로 있는 그림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포스럽다고 할 만한 밀실공포증과 불안의 느낌이 있다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불안감을 의식합니까?
나는 그 점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짐나 그 그림들 중 상당수가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던 어던 사람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을 통해 그것이 전달되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이미지를 포착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이 매우 예민해져서 거의 히스테리 상태에 있었는데, 어쩌면 이것이 그림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항상 가능한 한 직접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무언가가 직접적으로 다가오면 사람들은 공포스럽다고 느낍니다. 너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때때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거든요. 사람들은 사실 또는 진실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61)
21.비명은 무시무시한 이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나는 공포를 능가하는 비명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사람으로 하역므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깊이 생각해 보았다면 내가 그리려 했던 비명을 보다 성공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비명을 유발한 공포를 더 잘 알아차렸을 테니까요. 사실 그 그림들은 너무 추상적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시가적이기만 했다는 뜻인가요?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163)
22. 벌어진 입은 항상 비명을 의미합니까?
대부분은 그렇지만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입이 어떻게 형태를 변형시키는지를 알고 있을 겁니다. 나는 항상 입의 움직임과 입과 치아의 형태에 감탄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양한 성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항상 입과 치아의 외관에 매료되었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그에 대한 집착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한태는 아주 강렬했습니다. 입으로부터 비롯되는 광채와 색채를 좋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죠. 어떻게 보면 나는 모네가 일몰을 그린 것처럼 입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3)
23. 운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습니다. 운은 기다란 조각들을 이루며 진행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큰 행운이 이어지는 긴시기로 접어들죠. 작품 활동으로는 전혀 수입을 얻지 못했을 때 종종 카지노에서 돈을 벌 수 있었고, 그것이 잠시 내 삶을 바꾸었습니다. 나는 도박으로 번 돈으로 생활했고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운이 다한 것 같ㅅ브니다. (164)
24. 나는 내가 이기고 싶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실패를 한다 해도 나는 이기고 싶어 합니다. (165)
25. 훌륭한 성공을 거둘 때 당신에게는 어느 것이 더 의미가 있습니까? 그림에서의 우연을 두고 당신이 사용했던 표현, 즉 '신이 당신 편이라는 느낌'인가요? 아니면 그 성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호화로운 생활의 이점입니까?
성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풍요로운 생활을 원합니까?
나는 '풍요로운 누추함'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호화로운 곳에서의 생활을 혐오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할 때에는 호화로운 곳에 가서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를 들어 좋은 호텔에서 머무는 것은 어떤 점이 좋습니까?
나는 안락함을 좋아합니다. 서비스를 쉽게 제공받을 수 있는 점도 좋아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전혀 그런 방식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 가면 원하는 것, 돈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주 손쉽게 준비된다는 점이 대단히 좋습니다.
당신을 매혹하는 것은 그 편안함인가요, 아니면 호화로움 그 자체인가요?
그 편의성입니다. 호화로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호화로움은 확실히 사람을 바꿉니다. 내 말은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몹시 따분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종 사소한 장치와 여행을 계획하며 권태를 줄여보고자 합니다. 한번은 리츠칼튼 호텔에서 우연히 어떤 부자와 함께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락나 일이 있습니다. 그는 소호의 쇼핑가에서 완두콩과 새 품종의 감자를 샀는데 봉지가 터지는 바람에 엘리베이터 바닥에 모두 쏟아졌죠. 내가 보기에는 그의 방에 작은 석유난로가 있어서 그 완두콩과 감자를 조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 부자에게 있어 호화로움이 갖는 의미입니다.(166)
26. 나는 운을 우연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우연이 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고 풍요로운 측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그것을 나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연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나는 우연과 우연이 가져다 주는 것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만큼 순수한 우연이고 얼마만큼 조작된 우연이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우연을 다루는 데 보다 능숙해졌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연히 만들어진 흔적을 다루는 데 보다 능숙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을 벗어나서 만들어 내는 흔적입니다. 사람이 시간과 우연히 일어난 일에 따르다 보면 우연이 제시하는 것에 보다 민감해지게 됩니다. 내 경우에 지금까지 좋았던 것은 모두 내가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우연의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우연이 내가 포착하려는 사실에 대한 혼란스러운 시각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입닏. 그 이후에 나는 비삽화적인 것으부터 무언가를 시도하며 정교하게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167)
27. 그것들이 우연이 작동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추상화에서처럼 캔버스에 무의식적인 흔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흔적이 당신이 사로잡힌 사실을 포착할 수 있는, 보다 깊이 있는 방식을 시사해 줄 수도 있습니다. 내 경우에 우연은 항상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못할 때 작동합니다. 내가 좀 더 정확하게 모방하려 할 때 보다 삽화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미지는 극도롤 진부해집니다. 그 뒤에 분노와 절망에 빠져 그 이미지 안에서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흔적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그것을 망쳤다가, 문득 시각적 본능이 포착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감지하는 방식에 보다 근접해졌음을 알아채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내 경우에는 가장 생생한 순간에 사실을 포획할 수 있는 덫을 놓을 수 있느냐가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그럴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의식적인 결정이 작동하는 걸 어떻게 중단시킵니까?
그 순간 나는 이 작업이 얼마나 가망 없고 불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작용할지를 인식하지 않고 흔적들을 만듦으로써, 본능이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것으로 포착하는 무언가가 짧은 순간 갑자기 나타납니다. (171)
28. 나는 잘 정돈된 이미지를 원하지만 그것이 우연히 발생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연이 너무 쉽게 생겨나는것을 바라지 않을 만큼 절제합니다.
나는 작업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우연을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우연은 그런 것입니다. 우연을 명령한담녀 그저 또 다른 종류의 삽화를 부과하게 될 뿐이니까요. (173)
29. 당신이 자유로워지고 그런 일이 당신을 지배하는 순간을 자각합니까?
무의식적인 흔적이 다른 흔적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암시적인 경우가 매우 자주 있습니다. 바로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흔적을 만드는 동안 그것을 느낍니까?
아니요, 흔적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나는 그래프를 보듯 그 작업을 살핍니다. 그 그래프 안에서 다양한 사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내가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죠. 초상화의 경우 입을 어딘가에 배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득 그 그래프를 통해 입이 얼굴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초상화에서 사하라 사막처럼 보이는 외관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사하라 사막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그것과 유사하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상반되는 것을 조화시키는, 다시 말해 동시에 모순되는 것을 만드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술가는 작품이 가능한 한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그리기로 작정한 대상에 대한 단순한 삽화와는 다른 감각의 영역을 크게 열어 주거나 암시적이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이것은 모든 미술이 다루는 문제 아닐까요?(173)
30. 삽화적인 형태와 비삽화적인 형태의 차이점을 정의 내릴 수 있습니까?
삽화적인 형태는 사고력을 통해 형태가 무엇에 대한 것인가를 즉각적으로 말해 주는 반면 비삽화적인 형태는 먼저 감각에 호소하고 그다음에 서서히 사실을 향해 다시 흘러간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건 사실 자체가 얼마만큼 모호한지, 외관이 얼마만큼 모호한지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형태를 기록하는 것이 그 기록의 모호함을 통해 사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174)
31. 고속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매우 호호하고 흥미로운, 전혀 예상치 못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그 이미지는 분명 대상의 이미지이긴 하지만 그 대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또는 그 형태가 발 그 대상이라는 점이 놀랍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삽화입니까?
삽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은 우회적인 삽화라고 봅니다. 카메라를 통한 직접적인 기록과의 차이점이라면, 미술가는 어떤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실을 산 채로 포획하려는 덫을 놓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해야 덫을 잘 놓을 수 있을까요? 어느 지점에서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 덫이 달깍 소리를 내며 잠길까요? 또 다른 문제도 있는데, 그건 질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림의 질감은 사진의 질감보다 보다 직접적으로 보입니다. 사진의 질감은 삽화의 과정을 거쳐서 신경계로 넘어가는 반면 그림의 질감은 곧장 신경계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음의 경우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 풍선껌으로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 훌륭한 미술 작품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풍선껌으로 만들어진 스핑크스상이 있어서 그것을 조심스레 잡아 들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수 세기가 흐른 뒤에도 감각에 동일한 효과를 발휘할까요?
훌륭한 작품의 효과는 이미지와 재료가 결합되어 불가사의한 방식에 달려 있다는 예를 든 겁니까?
나는 이미지의 힘이 내구력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이미지를 몇 시간 뒤면 사라질 재료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지의 잠재력은 일정 부분 그것이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미지가 오래 지속될수록 당연히 그 주변에는 보다 많은 감각이 축적됩니다. (175)
32.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렘브란트의 훌륭한 자화상을 떠올려 보세요. 그 작품을 분석해보면 눈에 구멍이 거의 없고 거의 전적으로 비삽화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사실의 불가사의는 비이성적인 흔적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통해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비이성적인 흔적은 의지로 만ㄷ르어 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연이 항상 작업 과정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순간 그저 또 다른 형태의 삽화를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 보듯 매우 뛰어난 이미지의 구성으로 이끄는 비재현적인 흔적의 응결이 때때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 중 일부만이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배후에는 벰브란트의 심오한 감각이 있습니다. 바로 그 감각이 비어성적인 흔적을 움켜 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추상표현주의는 렘브란트의 흔적에서 모두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 작품에서 그것은 다른 한 가지와 함께 이루어졌는데, 바로 사실을 기록하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 내게는 이 작품이 훨씬 더 흥미롭고 심오합니다. 내가 추상화를 싫어하는 이유, 또는 추상화가 내게 흥미롭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나는 그림이 이중적이라고 생각하는 데 반해 추상화는 전적으로 심미적이기 때문입니다. 추상화는 언제나 하나의 단계에만 머뭅니다. 그것은 오로지 패턴이나 형태의 알므다움에만 관심을 갖죠.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미술가들이 폭넓은 영역에서 통제받지 않는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추상 미술가들은 자신이 만드는 흔적을 통해 그런 다양한 감정을 포착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으로 포착된 감정은 너무 미약하여 어떤 것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미술은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 질서 안에 대단히 본능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같은 것들은 사실을 정리하여 보다 격렬한 방식을 통해 신경계로 되돌리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은 위대한 미술가들이 이미 존재한 이후에도 뭐든 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위대한 미술가들이 대대로 이룩한 성취를 통해서 사람들의 본능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능이 변함에 따라 내가 어떻게든 이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보다 정확하게, 보다 격렬하게 다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감정이 부활합니다. 나는 미술이 기록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보도라고 생각합니다. 추상미술에는 보도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작가의 미학과 그의 몇 가지 감각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는 어떠한 긴장감도 없습니다.
추상미술이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추상미술이 매우 약화된 서정적 느낌을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라도 그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추상미술이 주요한 의미에서 진정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178)
33. 추상화는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추상화가 관람객이 미술에 대해 갖는 특정한 기대를 방해하여 긴장감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관람객이 추상화에 보다 깊숙이 빠져들 수 있다고 봅니다. 누구든지 소위 통제받지 않은 감정에 보다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연애나 질병을 구경꾼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이와 같은 것들에 뻐져들어 자신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술이 다루는 바와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은 관람객이 공연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추상미술에 한층 더 깊숙이 빠져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싸울 필요가 없는 보다 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추상화가 패턴 제작에 지나지 않는다면, 때로 추상화에 대해서 구상화의 경우와 동일하게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는 나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유행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나는 오직 시간만이 그림에 대해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어떠 미술가도 살아생전에 자신이 그린 작품에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작품에 대해 형성된 이론들로부터 이를 가려내기 시작하려면 적어도 75~100년은 걸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락 그것을 두고 형성된 이론에 따라 작품을 접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행은 당신이 특정한 것들에 감동을 받아야 하고 그 밖의 다른 것들에는 감동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크게 성공한 미술가들조차 자신의 작품이 조금이라도 좋은지 아닌지를 결코 알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겁니다. (181)
34. 얼마 전 당신은 그림 한 점으 구입했는데.....
앙리 미쇼의 작품이었습니다.
미쇼의 그 작품은 다소 추상적이었습니다. 당신이 종국에는 그 작품에 싫증을 내어 누군가에게 팔았거나 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 작품을 구입했습니까?
무엇보다도 나는 그 작품을 추상화라고 생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미쇼가 매우 지적이고 이성적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죠. 나는 그가 가장 뛰어난 타시즘(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 추상미술의 경향, 작가의 직관에 따른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붓놀림을 특징으로 한다-옮긴이 ) 또는 자유로운 흔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식, 즉 자유로운 흔적을 만드는데 있어서 그가 잭슨 폴록보다 더 낫다고 봅니다. (181)
35.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미쇼의 작품이 보다 많은 사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은 더 많은 것들을 암시합니다. 그 그림을 포함해 그의 작품 대다수는 삽화적인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만 인간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흔적을 통해 늘 그것의 재창조로 이어지는 방법을 다루었습니다. 그것은 대개 깊게 골이 진 벌판 또는 그와 유사한 곳 사이로 다리를 질질 끌며 걷는 사람의 이미지를 띱니다. 그의 작품은 움직이고 넘어지는 등의 이미지를 다룹니다. (183)
36. 결국 사람은 항상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에 더 가까운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확실히 나는 풍경화에는 흥미를 덜 느낍니다. 나는 미술이 삶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큰 집착은 스스로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 그다음은 동물이고, 풍경이 그 뒤에 올 겁니다.
당신은 주제에 대한 전통적인 서열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서열에 따르면 역사화, 곧 신화적, 종교적 주제를 다룬 그림이 1순위이고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가 차례대로 그 뒤를 따릅니다.
그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작업이 보다 까다롭기 때문에 이제는 초상화가 가장 앞섭니다. (184)
37. 당신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 작업이 보다 어렵기 때문에 한 명의 인물에만 집중하는 건가요?
다수의 인물이 개입하게 되면 이내 그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일종의 서술 구조를 형성합니다. 나는 항상 이야기 없이 다수의 인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린 세잔의 그림처럼 말입니까?
네.(184)
38. 당신이 얼마 전 그린 한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서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 작품은 '십자가 책형' 삼면화로, 오른쪽 인물이 나치의 만자 완장을 두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인물이 나치당원을 의미한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치 당원이 아니라 장 주네의 희곡 <발코니>의 등장인물처럼 나치당원으로 변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서술적인 해석의 사례입니다. 우선 이 중 당신이 의도한 것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싫어하는 서술적 해석의 일종인지 궁금합니다.
나는 그런 것을 싫어합니다. 나치의 만자를 그린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팔의 연속성을 끊고자 완장을 그려 넣었고 팔 주변에 붉은 색을 더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리석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인물활르 그리는 작업의 일부분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나치라는 해석의 수준이 아니라 형태적인 고려의 수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나치의 만자를 사용한 거죠?
왜냐하면 그때 아돌프 히틀러가 수행단과 함께 서 있는 사진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만자가 그려진 완장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릴 때 사람들이 거기엣 ㅓ이야기를 보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85)
39. 사람들이 그것을 서술적으로 해석했을 때 거슬렸습니까?
특별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작품을 두고 이야기 한 것에 화를 낸다면 나는 끊임없이 짜증을 내게 될 테니까요. 나는 그것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의도한 바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187)
40.이야기를 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피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폴 발레리가 말했던 '전달의 지루함'없이 감가을 전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야기가 개입하면 지루함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런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봅니까? 아니면 아직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 겁니까?
아직 벗어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벗어난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87)
41. 지금 그림을 그리는 일이 과거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나요?
네. 지금이 더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화가들에게 두 가지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록을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그 기록을 넘어서는 일도 했습니다. 영상과 카메라, 녹음기와 같은 기계적인 기록 방식이 있는 오늘날에는 그림이 보다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향해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피상적인 수준에서는 다른 매체들이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영화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는 편집과 리메이크를 통해 새로이 만들어집니다. 나는 직접적인 사진과 녹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수단들이 과거의 화가들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었던 삽화적인 작업을 넘겨받았다고 봅니다. 이 점을 깨달은 추상화가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삽화와 기록으 모두 거부하고 오직 형태와 색채의 효과만을 내는 것이 어떨까? 물론 논리적으로 매우 타당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지요. 단순히 자유로운 방식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형태와 색채를 기록하는 것보다는 기록하고 싶은 삶의 특정 측면에 대한 집착이 훨씬 더 큰 긴장과 흥분을 주니까요. 나는 우리가 오늘날 매우 기이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양극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에는 경찰 보고서와 매우 흡사한 직접적인 기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훌륭한 미수을 창조하려는 시도만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시대에 그 중간이란 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훌륭한 미술을 창조하려고 시도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우리 시대에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을 기록하는 뛰어난 기계적 수단들과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더 극단적인 작업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그건 바로 단순한 사실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수준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것, 이미지의 실재에 대한 보다 깊은 자각으로 이끄는 감각의 영역을 열어 주는 것, 이와 같은 것들을 살아 있는 날것으로 포획되어 보존되고 최종적으로는 고정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현 상황이 그렇습니다. (189)
42. 나는 항상 우정이란 두 사람이 진정으로 서로를 혹평하면서 그것을 통해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189)
43.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비평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은 적이 있습니까?
부정적인 비평, 특히 다른 미술가들의 부정적인 비평이 가장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분석해 본 결과 그 비평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분석하고 생각해 보게 되니까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친구들의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비평을 할 수 있습니까?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과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190)
44. 그렇다면 그들의 성격을 비난하는 경우에는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까?
그 편이 쉽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셩격보다는 작품에 대해 자부심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디. 그들은 특이하게도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구속을 받지는 않아서 성격을 노력하면 고칠수 있다고 생각하죠. 반면 외부에 노출된 작품에 대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나는 늘 진심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화가를 찾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의 자질과 감각을 신뢰하기에 내 작품을 진심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의 판단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다른 예술 분야에서 에를 들자면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 예이츠가 함깨 활동하던 상황이 매우 부럽습니다. 파운드는 <황무지>를 신랄하게 바판했습니다. 그는 또한 예이츠에게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죠. 사실 엘리엇과 예이츠가 파운드보다 훨씬 더 나은 시인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이렇게 하면 안 돼, 저렇게 하지 마!라고 말하여 이유를 알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당신은 그러한 도움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럼요, 물론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느 부분에서 내가 잘못하는지 말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