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7.
삶의 질감
1.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조각에 대해 매우 많이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조각을 하고 싶을 때마다 그림에서 더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한 번도 시도하지는 않았짐나 말입니다. 지금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조각을 다루는 회화 연작을 제작해서 그것이 어떻게 그림으로 구현되는지를 살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실제로 조각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생각한 조각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일종의 구조물 위에 있는 조각을 생각했습니다. 그 구조물은 아주 커서 조각이 그것에 따라 미끄러지듯 움빅일 수 있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조각의 위치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 구조물은 이미지만큼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미지를 발생시키기 위해 존재할 것입니다. 나는 그림에서 이미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구조물을 매우 자주 사용했습니다. 나는 조각에서 그것이 보다 통렬하게 이미지를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61)
2. 사실 내 마음속에는 미켈란젤로와 머이브리지가 함게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머이브리지로부터는 자세를, 미켈란젤로로부터는 형태의 풍부함과 웅장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머이브리지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각각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 작품의 형상 중 대다수가 남성 누드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조형 예술에서 가장 육감적인 남성 누드를 만들었다는 사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미켈란젤로의 뒤얽혀 있는 형상의 특성 이미지가 당신의 작품 속 성교하고 있는 형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
글쎄요. 그 이미지들은 머이브리지의 레슬링 선수 사진에서 가져온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진들 중 일부는 현미경으로 보지 않는 이상 성교의 형태로 보입니다. 사실 나는 하나의 형상을 그릴 때에도 그 레슬링 선수들의 이미지를 종종 사용합니다. 함께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은 한 사람을 찍은 사진에는 없는 농밀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머이브리지의 사진만 보지는 않습니다. 나는 늘 축구선수나 복싱 선수등을 찍은 다양한 잡지 속 사진들을 봅니다. 특히 복싱 선수들의 사진을 눈여겨보죠. 또한 동물 사진도 늘 봅니다. 인간의 움직임을 다루는 나의 이미지에서는 동물의 움직임과 인간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273)
3. 누드는 동시에 특정 인물의 외관과도 밀접하 관계가 있나요? 어느 정도는 누드를 인체 초상화로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복잡한 문제입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몸을 무척 자주 생각합니다. 내게 특별히 영향을 미친 몸의 윤곽선을 떠올립니다. 그런 다음 그 몸은 때때로 머이브리지의 사진 속 몸과 결합합니다. 나는 머이브리지의 사진 속 몸을 내가 알고 있는 몸의 형태로 조정합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그것은 늘 이미지의 분열 또는 왜곡을 통해 특정한 몸의 외관으로 향하는 모호한 방법이 됩니다. 내가 외관을 발생시키고자 노력하는 방식은 늘 어떤 외관이냐의 문제를 낳습니다. 오래 작업할 수록 어떤 외관인지, 소위 외간이라는 것을 또 다른 매체로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 깊어집니다. 보고 있는 외관의 등가물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 어느 때고 색과 형태를 응결하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 필요합니다. 외관은 잠시 동안만 그 상태로 고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내 당신은 눈을 깜빡이거나 머리를 살짝 돌릴 수 있고, 다시 바라보면 그 외관은 이미 변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외관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조각에서는 이 문제가 훨씬 더 첨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루는 재료가 유화 물감만큼 유동적이지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어려움을 더합니다. 이 추가적이 어려움이 종종 문제의 해결을 보다 까다롭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실제로 제작하는 과정상의 어려움이기 때문입니다. (275)
4. 나는 점차 이미지를 보다 간결하면서도 복잡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건 배경이 매우 통일성이 있고 분명할 때 더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요. 아마도 이런 이유로 이미지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매우 또렷한 배경을 사용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75)
5. 나로서는 회화적인 이미지와 선ㅁ여학 ㅗ고른 바탕 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노력햇던 다른 화가의 경우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건 아마도 내가 편안한 분위기를 싫어하기 때문일 겁니다. 회화적인 그림은 너무 편안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매우 삭막한 배경의 내밀한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나는 이미지를 실내나 집으로부터 떼어 내어 고립시키기를 원합니다. (277)
6. 운 또는 우연에 대한 긴 논의로 다시 돌아가 보죠. 계속해서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당신이 말한, 이른바 우연적으로 보이는 그림에 대한 당신의 반감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에 의해 생겨난 이미지가 의지에 의해 생겨난 이미지보다 모종의 필연성을 더 지닐 것 같다는 당신의 믿음입니다. 이미지가 우연에 의해 생겨날수록 보다 필연적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경우 이미지는 방해를 받지 않고, 더 생생해 보입니다. 우연에 의해 생겨난 형태의 이음새가 보다 유기적으로, 보다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방해의 결여, 이것이 실마리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의지가 본능에 의해 억제됩니다.
우연이 작동하는 중에 보다 깊은 특성이 전달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즉 두뇌가 이미지의 필연성을 방해하는 일 없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그 주위에 고정된 무의식의 거품과 함께 곧장 밀려오는 듯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이미지가 지닌 생생합니다. (278)
7. 시작한 작업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죠. 이것이 좌절과 절망으로 무언가가 발생하는 때보다 확실히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경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작업이 형편 없이 진행될 때 그리고 있던 이미지에 물감을 칠해 엉망으로 만든느 방법을 통해서 보다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조롭게 진행될 때보다 훨씬 더 자유분방하게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절망이 보다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절망으로 인해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보다 과감함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8)
8.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절반은 당신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씁니다. 당신이 쉽게 할 수 있어서 방해하길 바라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자리에 앉아서 당신의 사실적인 초상화를 아주 손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항상 방해하는 것은 정확한 사실성입니다. 나는 그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합니다. (279)
9. 물론입니다. 유동적인 유화 물감의 경우 작업하는 동안 이미지가 계속 변합니다. 물감은 다른 물감을 덮어 버리거나 훼손하죠.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화 물감을 다루는 일이 실제로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붓을 이 방향이 아닌 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무리 무의식적인 움직임이라 해도 이미지가 함축하는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버립니다. 그러나 그건 눈앞에서 벌어져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붓의 한쪽 면을 또 다른 색으로 채우고 그 붓을 누르면 우연적으로 다른 흔적들에 반향을 일으키는 흔적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미지의 심화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우연과 비판 능력 사이의 힘겨루기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것에 비해 더욱 실제적이고 이미지에 보다 충실한 흔적을 줄 수도 있지만 그걸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판적인 감각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판 능력은 반무의식적인 또는 매우 무의식적인 조종과 동시에 작동합니다. 어쨌든 작동을 한다면 말이죠.
10. 우연에 맡기는 태도가 당신의 생활방식 전반에 스며 있는 듯 보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돈에 대한 당신의 태도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은 그림ㅁ으로 그리 많은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설령 그림을 팔았더라도 당신은 눈앞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샴페인과 캐비아를 샀을 겁니다. 당신은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죠. 늘 신중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욕심 때문입니다. 나는 삶에 대한 욕심이 많고 미술가로서도 욕심이 많습니다. 우연이 나의 논리적 계산을 크게 뛰어넘어 내게 가져다줄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에 대해서도 욕심이 많습니다. 어느 정도는 나의 욕심이 나로 하여금 우연에 따라 살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욕심, 술에 대한 욕심,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자 하는 욕심, 벌어지는 일이 가져다주는 흥분에 대한 욕심말입니다. (나의) 작업에도 적용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길을 건널 때 양쪽 모두를 살핍니다. 삶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처럼 죽음과 부딪쳐 보려는 방식으로 우연을 놓고 장난치지는 않습니다. 삶은 짧고, 내가 움직이고 보고 느낄 수 있는 삶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룰렛에 대한 당신의 취향이 러시안룰렛으로 확대되지는 않았군요.
네, 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한 사람이 내게 니콜라 드 스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러시안룰렛에 집착했고 밤에는 종종 엄청난 속도로 절벽 위의 도로를 역주행하곤 했습니다. 사고를 피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거죠. 나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압니다. 그는 절망감으로 자살했습니다. 내게 러시안롤렛의 개념은 무익합니다. 또한 나는 용기를 갖고 있지도 않아요. 분명 물리적인 위험은 매우 신 나는 일일수 있겠죠. 하지만 나는 너무 겁이 많아 그런 위험을 자초할 수 없습니다. 허영심에 들떴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게속 살고 싶고, 내 작품을 보다 훌륭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에 나는 살아야 하고 존재해야 합니다. (283)
11. 가진 돈이 얼마 없는데도 버는 대로 돈을 썼을 때 ㅎ나동안 궁핍했습니까? 아니면 항상 동무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나요?
나는 종종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상황ㅇ르 조종했습니다. 나는 항상 어떻게든 그럭저럭 살아가는 재주가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훔친다든가 하는 경우라 해도 도덕적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이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는 것은 불쾌한 일이겠지만 나는 훔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지금은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 훔치는 행위는 어리석은 방종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진 돈이 없을 때에는 종종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을 탈취하곤 했습니다. (284)
12. 충동에 따르고 결과를 받아들이며 안전을 무시하는 것은 당신의 행동 방식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회에 대한 당신의 시각을 지배하는 선입견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복지국가의 개념이 특정한 안전에 대한 보장과 더불어 일종의 삶의 왜곡으로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의 보살핌을 받는담녀 삶이 지루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도덕적인 빈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생 동안 모든 것에 대해 돌봄을 받는 것보다 더 지루한 일을 나는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지를 기대하고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삶에 대해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질 때 창조적인 본능이 축소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지만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사람들이 어떠한 보장을 받아야 한다고 믿지 않고, 어떤 것도 유지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복지를 일종의 삶의 왜곡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일종의 삶의 왜곡이자 그 잠재적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까?
복지는 삶에 대한 절망, 존재에 대한 절망의 반대입니다. 결국 존재란 어떻게 보면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돌봄을 받으며 잊히기보다는 존재의 위대함을 시도하고 만들어 나가는 편이 낫습니다. (284)
13. 분명 정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사회 정의 사이의 충돌을 다룹니다. 당신은 개인의 자유가 사회 정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사회적 불편등을 볼 때 불안해지지는 않습니까?
나는 그것이 삶의 질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삶은 전적으로 인위적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소위 사회 정의는 삶을 무의미하게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로 일부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고통이 당신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지는 않습니까?
아니요. 그과 같은 사회적 불편등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할 때 나는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대단히 의식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 부가 축적된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고질ㅈ겅니 극심한 빈곤이 존재하는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극빈국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가난과 전반적인 절망으로부터 벗언라 수 있는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예술이란 사람들의 고통과 사람들 사이의 차이의 산물이지 평등주의의 산물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285)
14. 그렇다면 사회를 판단하는 기준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훌륭한 예술을 낳을 수 있는 잠재력이라는 말인가요?
행복한 사회를 어느 누가 기억하고 신경 쓸까요? 수백 녀이 지난 다음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한 사회가 남긴 유산입니다. 아주 완벽한 나머지 그 완전한 평등함으로 기억될 사회가 등장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회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한 사회를 그 사회가 창조해내 것을 통해 기억합니다.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