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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8

T1000.0 2021. 2. 16. 00:15

8. 나는 내 얼굴이 싫다

1. 이전에 나눈 대화헤서 삽화가 아닌 것으로부터 외관을 만들어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내가 너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이미지가 비어성적인 흔적으로 구성되기를 바라는 이론상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머리와 얼굴의 특정 부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삽화가 이미지 안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부분을 생략한다면 그저 추상적인 디자인만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내가 자주 이야기했던 것은 아마도 실현이 불가능한 나만의 특별한 이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귀나 눈 등을 작품에 포함시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가능한 한 비이성적으로 포함시키고 싶습니다. 비이성성을 주장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생길 경우 그저 자리에 앉아서 외관을 삽화로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이미지의 힘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앉아서 외관을 삽화로 그리는 것은 전 세계에서 미술을 배우는 수백만 명의 학생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입닏. 그렇지만 내 의견이 매우 극단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이론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289)

2.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다르지만 불가사의하게도 유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비록 그 형식은 다르다 해도 미술가들이 종종 염두에 두는 목표입니다. 대상을 그 자체와 보다 유사하게 만들기 위해서 대단히 근본적으로 변형시킨다는 개념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띱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미술에서 매우 일반적인 목표입니다.

이룰 수 있기만 하다면 그것은 거의 마법을 부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일반적인 목표인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거리의 로스돈을 그린 초상화는 명확한 삽화적 흔적과 매우 암시적이고 비어성적인 흔적이 성공적으로 결합한 경우이지 않습니까? 일부 흔적들은 삽화의 목적을, 일부 흔적들은 비이성적의 목적을 충족시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작품은 분명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 두 가지의 결합니다. (292)

3.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건 다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ㅡ 사람들은 화장되지 않았다면 썩어 없어졌을 겁니다. 그들의 살이 썩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에 대한 기억은 남지만 그를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나는 화장에 반대합니다. 수천 년 뒤에도 세상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땅에서 발굴해 낼 사람이 없을 경우 따분하 테니까요. (293)

4.
초상화를 그릴 때 모델에 대한 당신의 느낌이나 모델이 느끼고 있는 바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한다는 것을 자각합니까? 아니면 단지 모델의 외관에 대해서만 생각하나요?

만드는 모든 형태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그림으로 그릴 때 그 대상의 외관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도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모든 형태가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감각적인 의미의 함축인가요?

그렇습니다.

형태를 그릴 때 그 의미를 자각합니까?

네. (295)

5.
자화상을 그릴 때의 접근 방식은 다른 사람을 그릴 때와는 전혀 다릅니까?

아닙니다. 훌륭한 골격 구조를 좋아하기 때문에 외모가 뛰어나 사람을 선호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동일합니다. 나는 내 얼굴을 혐오하지만, 다만 다른 모델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리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겠군요......, 장 콕토의 멋진 말 중 하나는 "날마다 나는 거울 속에서 죽음이 작동하는 것을 본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295)

6.
당신에게도 죽음이 닥친다는 것을 언제 깨달았습니까?

열입곱 살 때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 순간을 아주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길에서 개의 배설물을 보았을 때였는데, 죽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이란 것을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나는 벽 위의 파리처럼 잠시 동안 세상에 존재하다가 쫓겨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로 인해 몇 달간 괴로웠했습니다. (299)

7.
나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는 동안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런 태도 자체가 사실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는 동안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정한 태도를 만듭니다.

어떤 의미 말입니까?

그날그날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말합니다.

삶의 목적 말입니까?

무無를 위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삶은 궁극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신이 믿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에너지를 찾는다는 것이군요.

바로 그것입니다. 무를 위한 믿음이긴 하지만 그것을 믿습니다. 모순적인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게 마련이지만 그사이에 우리는 자신의 욕구에 의해 아무런 목적 없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모든 형태의 종교에 매우 분명한 혐오감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만큼이나 현대의 신비주의를 혐오하죠. 이 문제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일종의 피상적인 쾌락주의, 즉 현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는 듯 보이는, 단순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 욕구는 삶을 전적으로 지루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는 종교적인 믿음을 갖고 있고 신에 대한 두려움을 지닌 사람들 대부분이 단순히 쾌락주의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존경하기보다는 경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종교관을 통해 완전히 허위에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을 흥미롭게 만드는 유일한 요소는 그의 몰입입니다. 종교가 존재했을 때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종교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는 대단한 것이었죠. 그렇지만 만약 전혀 믿음 없이 무의미함에 온전히 전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그가 훨씬 더 흥미로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00)

8.
좌우 측면의 패널에 인물이 존재하기를 바란다는 점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인물들이 어떻게 작동할지는 전혀 몰럈습니다. (303)

9.
알다시피 나는 작품을 사전에 계획하지 않아요. 나는 형태들의 배치를 생각한 다음에 그 형태들이 스스로 형성되는 것을 관찰합니다. (303)

10.
무엇보다 나는 바닷가에 있는 무언가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비록 작품이 보여 주듯이 중앙의 패녈은 그다지 바닷가에 면하고 있지 않지만 배경에는 양옆 패널의 하늘과 동일한 색을 사용했습니다. 내게 이미지가 떠오를 때 비록 그림이 그 이미지대로 끝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지 자체는 내가 우연과 운이 작동해주기를 바랄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늘 스스로를 화가가 아니라 우연과 운을 위한 매개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뭔가요?

내가 그런 방식에 있어서 독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나는 단지 수용적일 뿐입니다.

이를테면 에테르 상태의 에너지에 대해서 말인가요?

나는 내가 본래 정력적이고 에너지를 잘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스스로를 탁월하게 여긴다고 보지는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저 부여받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308)

11.
결국 내 그림의 대부분은 이미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나는 결코 그림을 열심히 보지 않습니다. 내셔널 갤러리에 가서 나를 흥분시키는 훌륭한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은 나를 흥분시킨다기보다는 내 안의 모든 감각의 밸브를 열어 줌으로써 나로 하여금 보다 격렬하게 삶으로 되돌아가게 만듭니다. (310)

12.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가 본질적으로 ......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림으로 수렴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자신이 화가로서 특별히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화가로서 독특한 감각을 가졌고, 그 감각을 통해 이미지들이 내게 전해지고, 나는 그저 그것들을 사용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