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를 바꿀 수 있나.
상대의 단점을 보면,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저는 성격이 강하거나 무례한 사람을 대할 때 자꾸 분별심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분별심이 나요?”
“제가 봤을 때 단점으로 보이는 부분이 발견되면 ‘저런 부분은 고쳤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요.”
“질문자는 자기 성격을 쉽게 고쳐요, 못 고쳐요?”
“행복학교에 나가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서부터는 성격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래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성격은 잘 못 고칩니다. 성격을 고치려면 한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환골탈태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자꾸 남의 성격을 고치려고 하지 마세요. 내 성격도 고치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의 성격을 고치겠어요.
자기는 그나마 행복학교를 다녀서 조금씩 변할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은 행복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고 수행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이든 상대의 성격을 고치려고 하는 건 무모한 행동입니다. 스스로 고치려고 해도 잘 안 고쳐지는데, 고칠 마음도 없는 사람이 남이 와서 고치라고 한다고 해서 고쳐지겠어요. 고칠 마음이 있어도 성격은 잘 안 고쳐져요.
이런 사람이든 저런 사람이든, 그 사람의 성격을 좋다 나쁘다고 보지 말고 ‘아, 저 사람의 성격은 저렇구나’, ‘아, 이 사람의 성격은 이렇구나’ 이렇게만 봐야 합니다. 그렇게만 보면 주장이 강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내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주장이 강한 사람은 피하는 게 좋을지, 주장이 강한 사람은 조금 기다리는 게 좋을지, 주장이 강한 사람은 한 번 세게 부딪쳐서 불이 한 번 나도록 하는 게 좋을지, 그건 내 선택입니다.
이것은 날씨가 추울 때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예요. 날씨가 추운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날씨가 추우면 옷을 하나 더 껴입든지, 불을 피우든지, 그건 내 선택입니다.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이 세상 어디에 가서도 내가 주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저 사람 성격이 강하다’라고 말하는 건 ‘날씨가 춥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 강한 것을 갖고 좋다, 나쁘다고 판단할 게 아니라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내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추우니까 밖에 안 나가야 되겠다’, ‘옷을 두껍게 입고 나가야 되겠다’ 이건 내 선택입니다.
그것처럼 직장에 성격이 강한 사람이 있으면, ‘직장을 그만두자’, ‘이 직장을 그만두면 다른 곳에 가서 돈을 벌 수 없으니까 참고 다니자’, ‘한 번 세게 부딪쳐서 불꽃을 한 번 피워보자’ 이 중에서 자기가 선택을 하는 거예요. 이 방법과 저 방법을 시도해보면서 자기가 선택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주눅이 들면 안 돼요.
질문자는 지금 상대방의 성격을 자꾸 좋다, 나쁘다로 바라보고 그걸 고치려고 하는데, 성격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마치 날씨가 추울 때 ‘날씨야 따뜻해져라’ 몇 번 외쳐보더니 그래도 안 따뜻해지니까 ‘스님, 날씨가 안 따뜻해지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묻는 것과 같아요. 상대의 성격은 내가 고치려고 할 일이 아닙니다. 성격을 고치고 안 고치고는 그 사람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에게 어떤 대응을 할 것인지는 내 문제입니다. 남편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면, 그런 남편과 같이 살 것인지, 안 살 것인지, 살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이 중에서 내가 선택을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이 이렇게 해주면 같이 살고, 안 해주면 같이 안 산다’ 이렇게 생각하면 남편한테 평생 목을 매달고 살아야 합니다. 남편이 이렇게 해주면 웃음이 났다가, 저렇게 해주면 인상을 쓰는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남편이 어떻게 하든 그 상황을 두고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내가 주인이 됩니다.
관점을 이렇게 갖고 대응을 해보세요. 그것도 한 가지만 선택하지 말고 부딪쳐도 보고, 양보도 해보고, 여러 가지로 대응해 보면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날씨가 추울 때는 옷을 두껍게 입고 나가 보기도 하고, 너무 추우면 외출을 안 해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응을 해봐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자기 발견을 해나가는 게 인생입니다.”
< 스님의 하루 201110 >
T.
이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아들과의 관계에 적용해 본다. 아들을 고치려하지말고 나의 대응방법을 다채롭게 연구해보겠다. 아내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을 고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상대를 내 인식대로 고친다면 섭동을 통한 구조접속의 변화를 유발하는 길 뿐 달리 길이 없다. 하므로 상대를 괜히 고치려하지 말고 섭동의 방법들, 방편을 연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