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좋았더라 중도와 기쁨의 윤리학
1.
사람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립니다.
(프란시스 베이컨, 화가의 잔인한 손 p66)
2.
나는 누군가가 내 작품 또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작품에 대해서는 내 자신의 기준만 충족시키면 됩니다. 즉 내 작품을 읽으면서 <성 앙트완의 유혹>이나 구약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 시험해 봅니다. 이 두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치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듯이 말입니다.
- 윌리엄 포크너 (파리리뷰 인터뷰)
3.
특별한 누군가로 간주되는 것은 사로잡힘의 한 형태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이 뭐라뭐라하는 속성들을 자신의 뛰어난 자질들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내가 볼 때 맹목적으로 보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보는 것 -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의 인성이 아닙니다. (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314)
4.
이것은 마치 줄타기 곡예와도 같다. 줄의 한쪽에 도사린 위험은 정보를 제공하는 객체들의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인식현상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정보'를 가능케 하는 기제가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쪽에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제멋대로 해도 될 것 같은 비객관성과 임의로 가득찬 혼돈이다. 우리는 그 중간에 머무는 법, 줄 자체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뚜라나, 앎의 나무 152)
T.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보는 것 -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의 인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정보'를 가능케 하는 기제가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예쁜 신발에 예쁨이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멋대로 해도 될 것 같은 비객관성와 임의로 가득찬 혼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중간에 머무는 법, 줄 자체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
T2.
만약에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를 주관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제멋대로 해도 될 것 같은 비객관성과 임의로 가득찬 혼돈의 위험에 빠진다. 그렇다고 내가 보는 게 객관적이란 의미도 아니다. 중도는 마치 줄타기 곡예와도 같다.
#중도와기쁨의윤리학
#내가보기에좋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