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실재는 공하다
1.
진실을 말하자면, 내가 보는 실재는 공하다.
하여 내가 보는 실재를 환상처럼 본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보는 실재가 공하다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내가 보는 실재를 환상처럼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보는 실재가 공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환기시킨다.
2.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진실의 탐구입니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림을 그립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반 고흐, 그는 그 지점에 거의 도달한 사람입니다. 동생에게 보낸 뛰어난 편지들 중 하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어쩌면 환상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훨씬 더 정확하게 실재를 환기시킨다."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합니다. 아시잖아요, 진실은 변한다는 것을 진실, 그것은 허구입니다. 정치인과 경제인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진실을 보유합니까? 어느 누구도 단 한 번에, 모든 사람을 위한 진실을 확보하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회화에 대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화에 대해서 말할 때, 난 항상 당황스럽습니다.
(인간의 피냄새가 내 눈을 떠나지 않는다 92)
3.
내 생각에, 고흐가 그린 그림은 '내가 보는 실재가 공하다'는 것을 환상적으로 환기시킨다.
4.
그렇지만 사진은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진이 궁극적으로는 실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또한 심리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내가 저 벽에 걸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을 본다면, 그 순간 브람스는 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겁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측정하는 것은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관적이고 심리적으로 본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 시야에는 당신의 얼굴이 훨씬 더 크게 보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고 그 밖의 다른 것들에는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움직여 저쪽을 바라보면 당신의 얼굴은 작아집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눈은 마음의 일부분이지 않습니까? 이집트 회화에서 파라오는 다른 이들보다 세 배이상 더 큽니다. 한 고고학자는 파라오 미라의 길이를 측정한 뒤 파라오가 평균적인 시민에 비해 더 크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인의 마음속에서는 파라오가 실제로 더 컸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집트의 회화는 진실합니다. 그러나 기하학적 측면에서는 아니지요.
시각 장애인이 만든 인체 모델도 그렇습니다. 그 모델을 만들 때 시각장애인들에게 보다 중요한 부분은 더 돌출되어 있습니다. 얼굴과 손이 그 예입니다.
피카소가 나폴리에 가서 '파르네제의 황소'를 보았을 때 형상들의 손이 실물보다 더 크다는 점을 알아챘습니다. 그 인물들의 행위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파카소는 손이 거대한 발레 무용수들을 그렸는데, 매우 우아하고 가벼워 보입니다. 피카소는 무용수들이 그와 같이 움직일 때 보는 사람은 그들의 손을 좆아가게 되고, 따라서 보는 이들에게는 손이 더 커 보인다는 점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다시 그림이다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