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연이 있다.
나에겐 굉장히 중대한 책, <화가의 잔인한 손>은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했다. 아마 옮긴이가 최영미 시인인 것도 한몫했을 것 같다. 그녀가 좋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베이컨은 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가, 왜 나는 베이컨을 잊지 못하고, 급기야 그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긴 대담집을 번역할 마음을 먹었던가."
책을 읽는 독자인 나도, 베이컨은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나처럼 말하자면 "나는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체험'을 그의 그림이 유발시킨게 아닌가." 표현은 달라도 시인이 말한 느낌을 알 것 같다. (익숙하지 않게 말할 수 밖에 없는데) 시인인 옮김이의 말 역시 내가 공감을 체험하도록 유발시킨 것이다. 내 생각에, 누구에게나 자연이 있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름이 불성이든, 자연이든, 뭐든, 아무튼 거시기가 있다. 그것은 베이컨의 그림을 볼 때, 들뢰즈의 책을 읽을 때, 금강경을 읽을 때, 분명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데도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이게 뭐지? 뭔가가 분명하다. '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나는 주장한다.
[나는 '거시기가 있다'고 말해버렸다. 관습은 피할 수가 없나보다. 있다라고 말해버리면 거시기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해진다. 그러나 모든 말해지는 것은 관찰자에게서 말해지는 것이다.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있음에서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