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Rhyzome과 무위無爲
주변 환경과 리좀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생명력은 이런 상황에서는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신경 써서 잘라내고 솎아주고 가꾸기 때문에 리좀적인 생명력이 오히려 약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질문 속에 있다. '왜 잘 다듬어주고 정성껏 돌봐주는 데 제대로 못 사는 걸까?'가 아니라, 정성을 다해 돌봐주기 때문에 제대로 못 사는 것이다.
생명은 아무리 외부에 장애물이 있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겪어내고 이겨낼지 스스로 방법을 찾아낸다. 무엇보다 생명은 리좀적이어서 무수히 다양한 방향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쪽이 막힌다면 기꺼이 또 다른 방향을 찾아간다. 주변의 힘들을 빌리기도 하고, 다른 생명 안으로 들어가서 온전히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생명은 그대로 두면 리좀적 생명력을 발휘해서 잘 살아가지만,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방해받으면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풀들은 볼품이 없고 먹을 수도 없고 어디 쓰임새가 없다. 하지만 그 스스로의 생명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센 놈들이다. 누구에게 예쁘게 보인다거나 먹을거리가 되어 주는 것 혹은 어딘가에 쓰인다는 것은 모두 타인을 위한 것이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구를 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잘 쓰이기 위해, 가꾸고 다듬고 억지로 만드느라 생명력을 소진할 것인가? 생명 그 자체로 존재하며 자신의 생명력을 더 확장할 것인가? 무언가를 위한 존재는 생명력이 소실될 수밖에 없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일 때 최대의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다. (김연실, 들뢰즈와 산책하다 70~71)
T.
무위, 춤추기가 춤추기의 목적일 때 최대의 생명력을 가진다.
나는 리좀. 나는 나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