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묘[분별과 세상]
그러한 개념비판과 치료, 건강, 치유 등을 언급하는데 대한 거부는 영국 논리학자인 조지 스펜서 브라운을 생각하게 하는 군요. 그는 자신의 유명해진 저서 <형식의 법칙들>에서 관찰이라고 하는 것은 분별 행위로 시작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뭔가를 묘사하려 한다면 나는 먼저 어떤 분별을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분별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무엇이 보여 질 수 있는지를 규정한다고 조지 스펜서 브라운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선악의 분별을 통해서는 빈부, 미추, 신구, 병과 건강 등의 분별을 가지고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겁니다.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조지 스펜서 브라운에게서 '분별하라 그러면 세상이 나타나게 되리라'Draw distinction and a universe come into being라는 문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전체 우주가 생겨나게 만들고 사람들이 자신과는 분리되어 소위 외부 공간에 있다고 여기는 실재를 낳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런 물음이 문제라면 우리는 어떤 의미론적인 마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치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을 필연적으로 치유활동을 필요로 하는 병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의미론적 마술만을 얘기하는 것, 다시 말해서, 치유를 언급하지 않으면 병도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저는 어떤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을 도와서 그가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심리치료의 목적은 당신의 견해에 따르면 고통을 초래하는 현실표상을 덜 고통스럽고 덜 힘든 현실표상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되겠군요.
그런 목적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슬픔의 시간들이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덧붙여야겠습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어떤 사람의 죽음이나 어떤 끔찍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슬픔의 기간과 슬픔의 예식을 통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완화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 자체가 엊혀 지거나 없어지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을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발명품 123)
T.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이에게 병자나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죄가 본래 없음을 깨우쳐 고통을 극복하는. 허나 고통을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되는, 죄무자성종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