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서 벗어나는, 청정한 삶의 방식에 관한 명상
1.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되,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지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 금강경 >
5.
겸손, 검소, 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에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 검소, 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p10)
4.
아주 멋진 시각적 비유고 멋진 은유로군요. 춤추면서 행해지는 움직임의 목적은 장소이동을 가급적 빨리 하거나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고 움직임 그 자체가 중심이 되고, 움직임은 더 이상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군요.
저도 그렇게 봅니다. 자기준거적인 움직임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것입니다. 춤추기가 춤추기의 목적인 것입니다. 춤추기는 춤추기를 통해서 성립됩니다.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당신은 걸어감으로써 길을 만든다'You lay apath by walking it.라고 길은 영원한 것도 이미 완성되어 놓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길은 움직임의 순간에, 걸어감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푀르스터,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다 62)
2.
내가 볼 때 핵심 문제는 기대하지 못한 어떤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우리의 확실성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망스러운 체험들이 꼭 깊은 좌절과 분노로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체험들이 정말 극적으로 새로운 전망들을 열어젖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들이 충족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너무 흥분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잡기로 결정하는 거죠.
(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69)
3.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시는 건가요?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건 정확하지 않아요. '흐르도록 내버려 둔다.', '표류하게 내버려 둔다'는 의미죠. 난 인생의 대부분을 그런 식으로 지냈습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또 불안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요. 난, 그런 식으로 일생을 표류하며 살았습니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인간의 피냄새가 내 눈을 떠나지 않는다> 82)
6.
인과적 설명의 (당신 표현을 빌자면) 구성된 신뢰성을 따르지 않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런 삶은 매우 재미있고 반전이 많은 삶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매 순간 사고하는 방식과 방법을 결정하는 풍요로운 삶입니다. 어떤 전제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우리는 모두 죽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분명히 말할 수도 있고 혹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아직 살아 있는) 우리의 인생을 축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특별하고도 다른 어떤 세계를 위한 하나의 결정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를 생겨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다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