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곧 앎이다[벌어진 일은 모두 잘 된 일이다.]
누가 앎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기준이 무엇인가를 잠깐 생각해보면, 그 기준은 바로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 영역에서 나타나는 효과적인 행동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던진 물음에 따라 규정된 맥락 안에서 효과적인 행동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한 행위 주체를 한 조건에서 관찰하더라도 어떤 물음을 갖고 관찰하느냐에 따라 행위주체의 인지적 행동을 달리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학생은 고도측정기를 써서 탑 높이를 계산하기 위해 여섯 가지 수단과 방법을 썼지만 고도측정기를 고도측정기로서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맥락에서 보자면 이 학생은 요구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앎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교수가 던진 물음의 맥락에서는 학생의 앎이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식 또는 앎이 있나 없나를 평가하기란 섭동에 의해 유발된 유기체의 구조변화를 주위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보는 관찰자의 상대적인 맥락 속에서 이루어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게다가 관찰자는 유기체에 유발된 구조변화를 자기가 기대한 반응에 관련시켜 평가한다. 이렇게 볼 때 관찰자는 유기체의 모든 상호작용을 (관찰한 행동 전체를) 인지적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물로서 구조접속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이) 바로 그 생물의 존재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이다. 경구로 나타내자면, 삶이 곧 앎이다. 다시 말해 생명활동이란 생물로서 존재하는 데에 효과적인 행위이다. (앎의 나무 197)
T.
삶이 곧 앎이다. 우리가 실패라고 인식하는 경우는 특정 맥락을 규정한 상태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풍부해진 앎이 생기므로서 성공한 것이다. 벌어진 일들은 모두 잘 된 일이다. 삶이 곧 앎이다.
2.
옛날에 어느 젊은 대학생에게 다음과 같은 시험문제가 주어졋다. "이 고도측정기를 써서 학교 탑의 높이를 밝히시오!" 학생은 고도측정기와 긴 끈을 가지고 탑에 올라가 고도측정기를 끈에 묶어 탑 아래까지 조심스럽게 늘어뜨렸다. 그런 다음 끈의 길이를 쟀다. "30미터 40센티미터"가 그의 답이었다. 그런데 교수는 답이 틀렸다고 평가햇다. 학생은 단과대학장에게 청원서를 내어 다시 시험 볼 기회르 얻었는데, 교수는 또 다시 "이 고도측정기를 써서 학교 탑의 높이를 밝히시오!"라고 문제를 냈다. 학생은 고도측정기와 각도기를 가지고 탑 옆의 뜰러 가서 탑에서 얼마 떨어진 거리에서 고도측정기의 길이와 각도기를 이용해 삼걱법으로 탑 높이를 계산했다. 그 값도 30미터 40센티미터였다. 교수는 학생을 또 떨어뜨렸다. 그러자 학생은 다시 청원서를 내어 시험 볼 기회르 또 얻었지만 또 똑같은 문제가 나왔다. 이렇게 학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