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은 무엇을 설명하나?[설명원리]
1.
딸 : 중력은요?
아빠: 중력은 중력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표시야. 중력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중력이 설명하지는 않아.
딸 : 아.
(마음의 생태학 111)
2.
설명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쓴 유명한 <메타로그>를 통해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딸아이가 아빠에게 묻습니다.
딸 : 아빠! 본능이 뭐죠?
아빠 : 본능은, 얘야, 하나의 설명원리란다.
딸 : 설명원리는 뭘 설명하죠?
아빠 : 네가 그것을 (설명원리라는 것을) 통해서 설명하고 싶어 하는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딸 : 그러면 중력도 설명하나요?
아빠 : 원하기만 한다면 중력도 설명할 수 있단다. 그리고 우리는 달도 본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의 세기는 거리에 반비례하지.
딸 : 아빠, 그건 말이 안 돼!
아빠 : 그래 말이 안 돼, 분명히. 그렇지만 내가 아니라 네가 본능으로 시작했잖아.
딸 : 그러면 중력은 뭘 설명하지, 아빠?
아빠 :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 왜냐하면 중력은 하나의 설명원리니까.
딸 : 아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아빠 : 자, 넌 알고 있어. 설명원리들이 무엇인지. 두 개의 서술적 진술들을 서로 묶는 모든 진술은 하나의 설명원리야. 우리는 가령 달을 보고서 말이지, 오늘은 달이 여기 있어. 어제는 저기 있었는데!라고.
아빠가 딸에게 설명이라는 것들이 우리의 구성물이라고 말하려는 겁니까?
그는 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론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날은 달이 어떤 특정한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다음 날은 다른 위치에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두 개의 관찰을 소위 자연법칙을 통해서 묶어 냅니다. 자연법칙이 달의 위치변경을 초래했다고 말하는 거죠. 그리고는 이런 것을 인과적 설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과적 설명은 삼원적 (세 가지 원소를 포함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인, 결과 그리고 변형의 규칙을 포괄합니다. 이를 사람들이 관찰한 변화에 깔린 법칙이라 합니다. 손가락 사이에 백묵을 끼고 있다가 손가락을 벌리면 백묵은 땅에 떨어집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백묵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원인으로는 손가락을 벌리는 것이 되고 결과로는 백묵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변형의 규칙으로는 중력이 언급됩니다. 물론 우리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과적 결합에 대한 믿음은 하나의 현대적 미신이라는 사실을.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다 74)
T.
"그는 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론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설명은 그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가령 불교의 공이라는 개념의 설명은 공을 설명하지 않는다. 공의 의미론적 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부정"
공은 설명원리이고 이 설명원리들의 특성은 공에 대해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의 의미론적 현상만을 보여줄 뿐 공의 원리는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르니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 역시 진리로 확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중력처럼 공 역시 설명원리이고 발명품임을 알아차린다면 진리라는 명목으로 집착하지 않을 게다.
3.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보는 어떤 것을 우리의 본능으로 어떻게 창조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것을 거의 해내지 못했지요. 우리는 언제나 갇혀 있다, 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어떤 것을 본능적으로 창조하는 일입니다. 본능을 설명하자면, 그건 정말로 매우 복잡하죠. 수세기에 걸쳐 회화가 어떻게 변천해왔는가를 살펴볼 때,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에 의해 본능이 수정되는지, 아니면 본능 그 자체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당신을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본능이란 스스로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건 기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테크닉은 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회화의 기법에 관한 일종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그림에 관해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이 그림을 만드는가에 관해서라면, 그건 늘 똑같은 이야기인데, 즉 그림의 주체,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라면 당신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나의 방식대로, 절망적으로, 나는 나의 본능을 좇아 여기저기를 다닌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화가의 잔인한 손 118)
T2.
가령 본능은 본능을 설명하지 못한다. 본능이 무엇인지, 어떻게 오고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능을 정의하고 설명하려한다.
본능은 설명원리이다. 본능은 본능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표시다. 본능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본능이 설명하지는 않는다.
공이 무엇인지, 본능이 무엇인지, 그림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불가능하다.
진정 안다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