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붙잡을 수 없네
코로나로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이 슬픔을 어떡하죠?
“코로나 바이러스로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치료 중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완치 후 퇴원했지만 하루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이 슬픔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스님은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며 잠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질문자를 위해서도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전 세계적으로 19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나도 이만한 피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지금은 조용한 전쟁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기치 않게 원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부모님이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돌아가실 수도 있고, 병으로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이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이 괴로움은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내 슬픔을 극복하려면 부모님이 살아서 돌아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살아서 돌아올 수가 없으니 나는 이 슬픔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슬픔이 부모님의 죽음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인도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합시다. 그분이 돌아가셨지만 나는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나에게는 슬픔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분은 돌아가시지 않았지만 말이 잘못 전해져서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제가 들었다면, 저에게 슬픔이 일어납니다. 사실은 그는 죽지 않았는데도 슬픔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그 사람이 죽어서 슬픔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정보가 입력되었기 때문에 슬픔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병원에 가서 암 진단을 받았는데, 1년밖에 못 산다고 하면 슬퍼합니다. 이때 1년밖에 못 살기 때문에 슬플까요? 아닙니다. 1년 밖에 못 산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슬픈 거예요. 암에 안 걸렸어도 지금부터 1년도 못 살고 죽을 사람이 이 세상에 훨씬 많지만, 그들은 그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슬픔이 없습니다.
슬픔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은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 슬픔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은 나의 상실감에서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것도 영원히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빨리어(Pali)로 ‘아니짜(anicca)’라고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본래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변한다는 것을 바르게 알 때 우리는 상실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종교적인 방법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상실감은 고래로부터 인간에게 가장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특히 죽음이 괴로운 이유는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죽은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히 두 가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죽어서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천상, 천당, 극락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좋은 데 갔으니까 그렇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이것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겁니다.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간다 해도 멀리 가버리니까 상실감이 좀 있는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이 세상으로 다시 오는 것이니 상실감이 훨씬 적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 믿음이 죽음에 대한 슬픔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적인 방법으로 이 슬픔을 살펴보면, 부모님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너무 슬퍼하면 부모님이 미련을 갖게 되어서 더 좋은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님이 이미 죽었는데 자식이 슬퍼하면서 자꾸 부르면,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게 되어서 허공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무주고혼)이 된다’
그러니 어떤 이유로 돌아가셨든 이미 돌아가셨다면 빨리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인사를 해야 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렇게 인사를 하고 빨래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방법으로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선(禪, Zen)적인 방법은 조금 다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지금 많이 슬프잖아요. 그런데 1년이 지나면 슬픔이 좀 가라앉고 조금 나아질 겁니다. 또 1년이 지나면 더 나아질 겁니다. 3년이 지나면 웃으면서 살 것입니다. 그렇다고 3년 뒤에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나는 3년이 지나면 나아집니다. 그렇다면 3년 간 슬퍼하다가 나아지는 것과 지금 바로 나아지는 것 중 어느 것이 낫습니까?”
“지금 바로 나아지는 것이요.”
“이런 도리를 알면 지금 바로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슬픕니까?”
“네”
“그러면 3년 후에도 슬플까요?”
“그 때는 조금 나을 겁니다.”
“그러면 3년 간 슬프다가 3년 후에 나아지는 것이 나아요, 지금 바로 나아지는 것이 나아요?”
“...”
“만약 질문자가 방금 저와 나눈 대화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얼굴이 밝아지면서 ‘아, 슬픈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을 겁니다. 이것이 선(禪)입니다.
질문자는 성인입니다. 부모님은 언젠가는 돌아가시게 됩니다. 영원히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노인들의 대부분이 ‘고통 없이 짧게 아프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죽거나 짧게 병을 앓다가 죽으면, 죽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훨씬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가족들은 이별에 대한 준비가 안 됐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죽음이 큰 슬픔이 되죠. 그러니 이 슬픔은 준비가 안 된 나의 문제이지, 돌아가신 부모님의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느끼는 슬픔을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슬프다’ 이렇게 보지 말고,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서 나의 상실감이 슬픔을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어떤 것도 영원히 가질 수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 스님의 하루 21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