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를 신전으로 만드는 행복
1.
"가끔 사람들은 행복을 쾌락과 혼동합니다. 얼마 전 내가 인도의 라지푸르에서 강연을 할 때의 일인데, 내가 삶의 목표가 행복에 있다고 말하자 청중 속의 한 사람이 말하더군요. 어떤 구루(영적 스승)가 사람은 성적인 행동을 하는 순간에 가장 행복하므로 섹스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내가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던 겁니다. 난 내 생각을 말해주었습니다.
더 이상의 고통이 없는 해탈의 단계에 이를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영원한 행복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과 가슴에 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쾌락에 의존하는 행복은 불안정합니다. 어느 날엔 그곳에 있지만, 그 다음 날엔 없어질 수도 있는 행복입니다."
(달라이 라마 <행복론> p37)
2.
니체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신비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서 그것들은 도덕적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결과들>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 검소, 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에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 검소, 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p10)
T.
자신의 신체를 육감적인 쾌락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고통이 없는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사유를 정복하고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최고의 행복.
지속가능한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