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은 매개되는 게 아닙니다.
1.
그렇지만 당신의 작업은 원래부터 앎을 매개한다는 교육학의 근본의도와 원리적으로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은 늘 우리의 근원적인 모름을 강조하잖아요.
교사들의 보통의 생각은 자신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학생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그래서 배움이란 모름을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상태를 좋은 상태로, 모르는 사람을 아는 사람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철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처럼 작업을 하지요. 연금술사의 점진적인 변형이라는 학습이론적 은유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학생들은 아주 싼 물질이죠. 그렇지만 다양한 단계를 거쳐서 더 나은,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물질로 바뀌어야 하는 물질입니다.
그리고 학생을 바꾸는 마술재료인 효소는 앎(지식)이란 얘기고요.
그렇습니다. 그게 일반적인 믿음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앎을 매개한다는 생각에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앎은 매개되는 게 아닙니다. 앎(지식)이라는 것은 어떤 유기체에게 (누군가에게) 특정의 결과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설탕, 담배, 커피와 같이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는 그런 대상, 물건 혹은 사물에 파악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에는 이와 반대로 앎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 자신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앎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발생 혹은 창조의 과정이 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의 모습은 이런 식으로 이제 다르게 나타납니다. 배우는 사람은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으며 국가적으로 정당성을 부여 받은 권위가 (선생님이나 교수가) 나서서 사실과 자료 혹은 지식들을 채울 수 있는 그런 비어 있는 상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배움이 작동할까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움베르또 마뚜라나, 고든 패스크 그리고 그와 몇몇 다른 사람이 대변하는 생각은 새로운 교육학적 개념 틀을 공식화하는데 매우 흥미로울 겁니다. 배우는 사람은 이러한 인지(지각)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자입니다. 그는 스스로 앎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발명품 108)
2.
앞에서 권력은 복종을 통해 부여된다는 내 견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나는, 아무도 권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권력자들]은 스스로 복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권력을 부여받고,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물 같은 장난감 총을 갖고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총으로 여러분을 죽일 수 있어요." 한 여학생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어나세요, 아니면 쏘겠어요." 그녀는 물론 내가 절대 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일어났습니다. "교실 한 가운데로 오세요!" 그녀는 교실 한 가운데로 갔습니다. "바닥에 드러누우세요!" 그녀는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옷을 벗으세요!" 그 순간 그녀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싫어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나는 잠깐 기다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세요, 이렇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나에게서 내 권력을 빼앗아 갔어요. 내 권력은 여러분이 자진해서 복종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지 내가 권총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나는 내 학생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그들을 성찰과 지각의 다른 가능성들에로 이끌려고 노렸했습니다.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일정한 방식의 삶과 (그 삶의 방식이 출현하고, 또 그 자신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욕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주저함 없이 그것을 살아야한다. 기다림은 아무 쓸모가 없다.'(함으로 288)
3.
다음 강좌에는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왔고 나는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교수법 수업ㅇ르 실습이 됟도록 결정했습니다. 학생들과 나는 책을 쓰기로 합의해서 '관심의 색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유사한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만날 수 있도록 했지요. 많은 학생들은 별로 진지하게 임하지 않아서 그들의 주된 관심과 취미로 섹스라든지 잠이라든지 하는 것을 제시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도 모두 받아들여서 '관심의 색인'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최종적으로 인쇄되어 나왔을 때 몇몇 학생들은 그들 자신이 했던 바보 같은 대답에 놀라서 내게와서 사과를 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의 문제야'라고 말했고 그들은 당황해서 가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보듯이 대부분의 학생들은 '누구나 한번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질 수 있다'라는 그 강좌의 첫번째 교훈을 이해한 게 분명합니다.
4.
배우는 사람에 대한 이론이라는 공식을 통해서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며 정태적인 교육문화로부터의 결별이 도입되는 군요. 이제 앎을 더 이상 어떤 물건과 같은 것,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정보를 삼키는 학생에게로 운반되는 그런 것으로 이해하지 않게 되는군요.
전적으로 옳습니다. 저를 강연으로 늘 초대하는 여러 교육학자와 선생님들은 '학생 측에서는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학생에게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이 젊은이들은 어떻게 지각하는가? 그들은 수업시간을 어떻게 체험하는가?'하고 묻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학생들을 배우는 사람, 지각하는 사람, 인지하는 사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아주 즐거운 전환점으로 봅니다. 17세기에 출현해서 배움의 과정을 수동적인 정보수용으로 묘사한 뉘른베르크의 깔때기 같은 그런 교육에 대한 은유는 다른 개념과 생각으로 대체됩니다.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의 바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가능성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이용하고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발명품 109)
5.
글쎄요. 나는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그토록 여러번 이사 다니는 바람에...... 나는 훗날 내 스스로를 가르쳤지요. 사람들이 내게 추천하는 책이나, 혹은 스스로 발견한 책들을 읽었지요.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해서 나는 교육을 받은 겁니다. 학습과 학교는 내게 없었지요.
그리고 그림에 대해선 어땠나요?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나요?
아니오. 나는 가르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은 보면서 배우지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겁니다. 보세요. (화가의 잔인한 손 214)
6.
선사들의 화두.
여기서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직지, 자기 마음을 자기가 바로 꿰뚫어보게 된 침묵이었어요. 한참 뒤에 제자가 말했습니다.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노라."
제자는 마음을 편안케 했다는 스승의 말에 편안해졌어요? 아니면 내놓을게 없다고 대답할 때 이미 편안해졌어요? 스승이 깨달음을 준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증득한 겁니다. 깨달음은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지금 여기 33)
[깨달음, 앎은 스스로 증득하는 것, 내지 스스로 구성해 내는 것]
T.
선사들이 도를 설명하지 않는 이유는 앎은 매게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설명이란 헛수고를 할 이유없이 선사들은 앎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발생 혹은 창조의 과정이 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데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예컨대 수영을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수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수영을 할 줄 알겠는가?
설명을 조언으로 바꾼다면 앎의 큰 도움이 되지 않나. 단 조언은 포괄적이기보다 개별적이다. 방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