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앎의 과보 [좋은 것과 나쁜 것]
앎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앎의 앎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산출한다. 다이너마이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다이나마이트의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즉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하는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폭탄을 범죄의 도구로 쓰는 것은 나쁜 것이고, 필요한 길을 내는 데 쓰는 것은 좋은 것일 수 있다. 이 앎의 앎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책임질 세상이다.
'선악을 너머',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너머'를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
허나 한가지 덮붙일 말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때로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된다. 때문에 이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중심을 잡는 길(중도)은 내가 책임지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지않는 태도에는 객관성이나 법칙, 진리를 핑계삼아 자신을 숨기는 뿌리 깊은 문제가 있다.
"객관성이란, 관찰하기가 주체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체의 망상이다. 객관성에 호소하는 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인기가 있는 것이다."
2.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데, 앎을 모른는데 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앎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하는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우리는 흔히 이런 깨달음을 무시하거나 못 보게 스스로 억누르면서, 우리의 일상행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모든 일상행위는 빠짐없이) 세계를 산출하고 굳히는 데 이바지 한다. 우리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세계를 산출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 행위의 초월성을 보지 못하면, 우리가 부응하고자 하는 상(像)과 실제로 산출하는 존재를 혼동하게 된다 .이런 잘못은 오직 앎을 알아야만 고칠 수 있다. (앎의 나무 279)
T.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을 나쁜 인간으로 보는 것은 내 문제지. 그 사람 자체가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다. 내 관점에서 나쁜 것이다. 그런데 나의 관점은 확실성을 고집할 수 없다. 다른 관점 역시 나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의 관점은 맞고 다른 관점은 틀린 것이 아니라(그 반대 역시도) 서로 다를 뿐이다. 내가 보기에 핵심은 연결과 공존이다. 다툼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데 사람다움이 있다.
그 사람을 나쁘게 보고 미워한다면 미워하는 과보를 받아야한다. 그런데 나에게 나쁘게 보이나 내 관점의 확실성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나쁘게 보고 미워하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니 미워해서 받을 과보가 없다. 괴로움이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일 뿐이다'는 앎과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것은 내 문제'라는 앎의 앎은 우리에게 괴로운 과보에 얽메이지 않게 해준다.
"내가 볼 때 핵심 문제는 기대하지 못한 어떤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우리의 확실성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망스러운 체험들이 꼭 깊은 좌절과 분노로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체험들이 정말 극적으로 새로운 전망들을 열어젖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들이 충족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너무 흥분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잡기로 결정하는 거죠."(함으로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