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출현
1.
관찰자에게 행위의 언어적 조정은 구분, 곧 언어적 구분으로 나타난다. 구분은 언어적 영역에서 작업하는 이의 언어적 환경에 있는 객체들을 기술한다. 따라서 언어적 영역에서 작업하는 관찰자란 기술의 영역에서 작업하는 셈이다. 그밖에 언어란 언어적 상호작용들의 재귀과정을 통해, 곧 행위의 언어적 조정의 언어적 조정을 통해 생기는 현상이다. 때문에 언어적 영역은 행위의 언어적 조정이 일어나는 환경의 일부가 되며, 언어는 관찰자에게 기술의 기술이 행해지는 영역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관찰자가 하는 일은 정확히 말해 다음과 같다. 관찰자는 언어적 구분들을 언어적으로 구분한다. 또는 다른 관찰자가 말한다면 개체발생 속에서 기술의 기술을 산출한다. 따라서 관찰이란 공동개체발생 속에서 행하는 기술의 기술로서 언어와 함께 생긴다. 또한 언어와 함께 작업하는 관찰자는 자기가 참여하는 언어적 영역 안에서 언어적 구분을 통해 '나'와 '주위 사정'을 산출한다. 이런 방식으로 언어적 구분들의 관계인 '뜻(의미)이 생긴다. 그리고 뜻은 우리가 적응을 보존하는 영역의 일부가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람다움'에 담겨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기술에 대해 기술한다.(이 문장도 그렇듯이). 그렇다. 우리는 실제로 관찰자이며, 적응을 보존하는 가운데 언어 안에서 작업함으로써 생기는 언어적 영역에서 존재한다.
(앎의 나무 239)
2.
이미 살펴보았듯이 곤충에서 사회적 체계의 응집은 화학적 상호작용(영양의 흐름)에 바탕을 둔다. 우리 인간의 경우에 사회적 체계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언어의 흐름', 언어적 영양의 흐름, 곧 행위의 개체발생적 조정을 통해 생긴 언어적 영역이다. 인간은 오직 언어 안에서만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무엇이든 기술하고 상상하며 서로 관련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각자의 개체발생 전체를 (걷기에서부터 태도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철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가 몰고 온 이 결과들을 더 샅샅이 살피기에 앞서,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을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와 함께 언어가 생길 가능성이 생물들의 자연표류 속에 늘 존재했음을 보게 될 것이다. (239)
3.
순환[재귀]이라는 관념에 대한 선생님의 이러한 관심이 언어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 것이죠?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행위 순환[재귀]적인 조정, 즉 행위의 조정의 조정에서의 흐름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것, 즉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가 출현할 때 대상들이 출현합니다. 예컨대 택시 같은 것 말입니다. 택시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행위의 두 번째의 조정(첫 번째 순환[재귀])에 의해 조정을 이룬 행위의 조정으로서의 승객을 태우는 수송 및 운전은 행위의 세 번째 조정(두 번째 순환[재귀]) 속에서 택시라고 "이름 붙여져"나타나는 행위의 그러한 배치가 된다.' 이것은 (택시가 수송[실어나름]을 모호하게 하는 것처럼) 대상들이 자기들이 조정하는 행위를 모호하게 하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으로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생님이 제시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 새로운 이해가 갖는 장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언어가 정보 전송의 수단이 아니라, 그리고 소통 체계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의 흐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것은 상호작용하는 체계들의 구조적 결정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일단 이것이 파악되고 나면 상징들이 언어의 시초가 아니라, 역으로 언어가 상징들의 기원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잠깐 우리가 체계들의 상호작용 및 언어현상과 관련한 우리 대화의 앞머리에서 논의했던 인터뷰 약속이라는 핵심적인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이 칠레로 오기 전에 우리가 나눴던 전화 통화는 함부르크에서 산티아고로, 또는 산티아고에서 함부르크로 이어지는 정보 전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의 결과는 두개의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 푀르크젠과 마뚜라나-이 그들의 행위의 순환[재귀]적인 조정을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여기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함으로 147)
4.
내가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라면, 선생님은 언어에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특별히 발화의 효과들에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담론에서 우리는 일련의 상호 연관된 행위의 조정들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소통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상징체계들에 준거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개념들의 의미(의미론), 단어들 및 문장들의 구조들(어휘론 및 통사론),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 단어들, 문장들의 목적지향적이고 상황구속적인 활용(화용론)입니다. 내 질문을 반복하고 싶군요. 언어에 대한 선생님의 특별한 견해는 무엇입니까?
결정적인 측면은 이것입니다. '이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에는 하나의 순환[재귀]이 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적용의 결과들에 적용되는 주기적인 작동이다.' 내가 언어을 이해하는 데 이 요인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순환[재귀]을 관찰할 수 있을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 이러한 종류의 주기적인 작동들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현상들이 존재한다.
순환[재귀]의 이 특별한 효과에 대해서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이 마치 달리고 있는 것처럼 다리를 움직인다면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람도 당신이 지금 달리고 있으며, 움직여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당신이 어떤 팬터마임을 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당신이 다리를 움직여 공간을 움직이고 있다면, 누구나 당신이 걷거나 뛰기 시작했다고 인식할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달리기의 현상은 당신의 다리의 주기적인 움직임이 당신의 발이 그 순간에 우연히 딛고 있는 표면의 선형적인 이동에 연결될 때 정확히 발생한다.' 하나의 움직임은 이전의 움직임 위에 구축되고, 다리 움직임들의 단순한 반복은 하나의 순환[재귀]으로 변형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출현합니다. 즉 당신이 달리고 있는 현상이 출현하는 것이지요. (함으로 145)
5.
마뚜라나 내 견해는 그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언어 현상은 상호작용의 역사를 통해 진화해 온 특수한 구조적 합치로부터 출현합니다. 언어 출현을 위한 전제 조건-'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을 한 번 성찰해 보세요. 나는 상징들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차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언어 사용의 '원 상황'은 일상적인 상황입니다. 2차선 도로의 가장자리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 애쓰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제 방향으로 지나가는 택시들은 전부 승객들이 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마침내 반대쪽에서 달리고 있는 택시를 세우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눈을 마주친 다음 택시 기사에게 다시 허공에 원을 그리면서 손짓을 합니다.
푀르크젠 그럼 택시 기사는 방향을 바꾸어서 ......
마뚜라나 바로 그렇습니다. 그 손짓 때문에 택시 기사가 차선을 바꾸고 승객을 맞으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제 당신은, 예를 들어 당신이, 도로의 진행 방향에 갑자기 나타나 정차한 다른 택시를 그 사람이 이용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을 관찰할 때, 그리고 반대편에서 차를 돌린 먼저의 그 택시 기사가 그에게 "거기서 날 불러 놓고 지금 왜 그 택시를 잡는 거죠?"라고 소리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즉각적으로 알아챌 것입니다. 겨우 눈이 한 번 마주쳤고, 두 번의 팔 동작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것들은 발화들로 이해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입니다. 첫번째 팔 동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서, 택시 기사와 잠재적인 승객은 호혜적인 관계와 경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 승객이 허공에 그린 두 번째 팔 동작은 그들의 조정이 조정되도록 만듭니다.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 이러한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이 존재하는 때에는 언제나 언어가 존재합니다. 나는 이것들이 우리가 언어가 일정한 상황 속에서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들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함으로 143)
6.
재귀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언어가 생기려면, 언어적 영역에서 언어적 영역 자체에 속한 행동들의 상호조정이 일어나야 한다. 언어가 생기면 언어적 구분의 언어적 구분인 객체가 생긴다. 객체는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행동조정들을 가리는 작용을 한다. 예컨대 '탁자'라는 낱말은 우리가 어떤 탁자를 둘러싸고 하는 행위들과 관련해 우리의 행위를 조정한다. 그러나 '탁자'라는 개념은 우리의 구분행위가 '탁자'를 산출한다는 사실을 못 보게 가린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언어 안에서 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성찰적 과정 속에서 언어적 구분을 언어적으로 구분할 때 우리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어 안에서 작업한다는 것은 서로 일치하는 공동개체발생적 구조접속의 영역에서 작업함을 뜻한다. (앎의 나무 238)
세계는 언어 속에서 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