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관찰자만이 있을 뿐. 唯識
관찰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그것일 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해지는 것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와 관련해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게다가 명백하게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는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외부의 실재 또는 진리에 접근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40)
2.
우리의 접근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 세계의 재현물들을 계산하고 외부에서 오는 정보를 처리하는, 그래서 유기체의 적절한 행위와 적합한 반응들로 귀결되는 체계로서 신경체계를 서술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경체계는 이제 그 자신의 독특한 작동 방식을 갖춘 '구조적으로 결정된'체계로 보입니다. 이 체계 안의 어떠한 변화도 단지 유발될 뿐이지, 전적으로 외부 세계의 특질들이나 성질들에 의해 결정되거나 확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어지는 그 자신의 변형들 만을 계산합니다.
이 통찰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신경체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동들과 그것들 외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과정들 사이에 엄밀한 개념적 구분을 두어야 합니다. 또한 아주 확실히 해 두어야 하는 것은, 신경체계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고 단지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의 폐쇄적인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상호관계들이 영구적으로 약동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내부와 외부는 관찰자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체계 그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98)
3.
그렇지만 관찰자라는 선생님의 핵심 개념은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요? 통상적인 어법에 의하면 그 말은 -관찰하다, 거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중립성을 주장한다'라는 - 어떤 분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관찰자라는 말을 자신들의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묶여있는 참여자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이 좋지 않을 까요?
나는 관찰자라는 개념이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인 체험을 하는 가운데 여러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우리가 지각하고 다루는 그 사물들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히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외부의 관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관찰자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그것이 마치 자신들과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구분하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이제 이 체험이 설명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라면, 왜 우리가 어떤 것을 우리와 분리된 것으로 체험하느냐를 우선 밝히는 것이 선생님의 목표들 중의 하나이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여자라는 용어를 쓰라는 제안은 나에게는 호소력이 없습니다. 참여자라는 관념은, 설명과 '이미 만들어진' 대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남겨진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질문은 그 가정된 참여가 실현되는 특정한 방식에 관련될 것입니다. 이 방에 있는 탁자와 의자들, 나의 재킷, 내가 두르고 있는 목도리 --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바 없이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주어진 상황의 외부에, 그리고 그것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관찰하기가 하나의 체험, 즉 사물들의 외관상의 독립적인 존재와 역시 관계되는 체험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이러한 사물들이 저기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세계가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주장인가?'
4.
그렇다면 선생님의 출발점은, 우리가 불가피하게 우리의 실재들[현실들]을 구축하는 것에 연관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것들에 묶여 있다는 통찰을 확립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분리를 체험하는 것이겠군요.
처음에는 분리를 체험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결국엔 연결됨의 통찰로 바뀝니다. 물론 나는 내가 서술하고 있는 대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여기 탁자 위에 있는 유리잔을 가리키는 경우, 나는 그 유리잔의 일부가 아닙니다. 하지만 유리잔을 구분해 내는 것은 나와 관계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서술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구분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아무도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환경으로부터 특화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는 물질적인 실체 또는 관념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47)
5.
그럼 우리가 행하는 첫 번째 구분은, 실재를 구축하는 기원인, 알기의 빅뱅 같은 것이군요. 어쨌든 무언가를 볼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분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오직 구분되는 것만이 존재합니다. 설령 그것이 우리 자신과 구분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구분의 작동을 통해 그것과 묶여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구분할 때마다 구분되는 실체는 그 구분의 의미를 갖는 어떤 배경과 함께 출현합니다. 구분되는 실체는 그것이 존재하는 영역을 산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