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역량
편하게 돈을 주고 사서 먹을 것인가? 힘들어도 다른 재미와 감동들을 더 느끼며 살 것인가? 돈으로 산 참깨의 맛과 농사지은 참깨의 맛은 천지 차이였다. (들뢰즈와 산책하다 148)
마트에서 사는 만 원어치 참깨에는 만 원이라는 숫자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따뜻한 봄날 하얗게 핀 참깨꽃의 아름다움이나 더운 여름 참깨를 베며 흘렸던 땀의 맛, 싸우고 화해했던 사건, 깨를 수확할 때의 눈 내리는 가을 풍경, 참깨를 까불며 즐겼던 놀이의 기쁨, 이웃들과 나누는 기쁨 등의 가치는 모두 계산에서 빠지고 없는 것이다.(153)
그렇다고 해서 돈을 부정하고 거부하며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두가지 형식, 헐벗은 반복과 옷 입은 반복은 서로 독립적일 수 없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다. 헐벗은 반복은 차이 나는 반복들로 인해서 드러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잠재적 역량을 쓰지 않으면서 결과에 해당하는 껍데기에만 집중한다는 데에 있다. (153)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차이 나는 반복, 즉 역량들을 쓰는 일이지 이익을 따지기 위해 계산기만 두들기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나의 역량을 쓰는 것이 헐벗은 반복의 빈 껍데기로만 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154)
2.
나는 쾌락에 어떤 긍정적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쾌락은 지층들과 조직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욕망이 내부적으로는 법칙에 복종적이고 외부로부터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쾌락에 의해 야기되는 동일한 움직임 안에서이다. 이 두가지 경우 모두에서 욕망에 고유한 내재성의 장은 부정된다. 미셸이 사드에게 중요성을 부여했던 반면 나는 마조흐에게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니다. 내가 마조히스트라고 말하거나 미셸이 사디스트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이 아니다.
마조흐가 나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쾌락이 욕망의 긍정성과 내재성의 장의 구성을 중단시킨다는 생각 때문이다.(같은 방식으로, 아니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궁정식 연애에서 내재성의 장 또는 기관 없는 신체의 구성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 욕망에는 어떠한 결핍도 없고 욕망은 그 과정을 중단시킬 모든 쾌락들로부터 자유롭다). 내가 보기에 쾌락은 한 사람, 혹은 한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뛰어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수단이다. 그것은 재영토화이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욕망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핍의 법칙 및 쾌락의 규범과 연관되어 있다.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욕망과 쾌락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