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어 안에 존재한다
1.[괴로움]
존재의 어느 한 차원에서 구조접속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에 대해 성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생각을 주고받을 때 하는 행동조정이 우리의 경험과 얼마나 뗄 수 없게 뒤얽혀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때때로 어느 한 차원에서 우리의 구조접속이 허물어지는 일은 일상생활에서 (이를테면 물건을 사거나 아이를 키울 때) 거듭 나타난다. 이것은 끝없는 역사적 변천과정 속에서 우리의 개체 발생적인 구조적 표류가 방향을 바꾸게 되는 계기들이다.
2.[기적]
사람들은 보통 사회적 삶의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조차 거기에 담긴 언어적, 생물학적 응집성 뒤에 역사적 연관관계가 있음을 때닫지 못한다. 독자들은 아주 흔한 대화에 담긴 여러 과정들을 눈여겨본 적이 있는가? 예컨대 말할 때 음역이 생기는 과정, 낱말들이 나타나는 순서, 말하는 이가 바뀌는 계기 등등을 ...? 보통 이 모든 것들은 별 어려움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간단하고 직접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일상생활은 너무 간단하고 직접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그것의 풍부함을 보지 못하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행동조정들의 한판 춤인 것이다.
3.
이처럼 언어와 (그것이 나타나는) 사회적 맥락 전체가 생김에 따라 인간의 가장 깊숙한 경험인 정신과 자기의식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겼다. 그것에 걸맞은 상호작용의 역사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이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 늑대소녀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정신이란 사회적, 언어적 접속의 그물에서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지, 내 머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의식과 정신은 사회적 접속의 영역에 속하며, 그 영역에서 의식과 정신의 역동성이 작용한다.
4.
인간의 사회적 역동성의 일부인 정신과 의식은 또한 우리의 개체발생적인 구조적 표류가 밟는 길을 선택하는 작용을 한다. 나아가 우리는 언어 안에서 존재하므로 우리가 산출한 언어적 상호작용의 영역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의 일부가 되고, 따라서 우리가 그 안에서 정체와 적응을 보존해야 하는 환경의 일부가 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날짜를 기록했고 저녁마다 성경을 읽었으며 저녁 먹기에 앞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영국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자기가 사람답게 살면서 자기 정체와 적응을 보존할 수 있었던 언어적 영역에서 사는 것처럼 행동했다.
5.[언어적 영역과 인연]
이런 것들에 대해 과학자로서 말하는 우리의 처지도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것을 통해 산출하는 언어적 영역(사회적 영역)에서 과학자라는 우리의 정체를 보존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자로서 우리는 사라지고 만다.
6.
구조는 얽어맨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행동을 둘러싼 언어적 영양의 흐름을 통해 우리가 쉬지 않고 엮어가는 구조접속의 그물체 안에서다. 언어란 그저 어떤 바깥세계를 내면화하려고 누가 만들어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런 세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쓸 수도 없다. 인식활동은 언어를 구성하는 행동조정을 통해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세계를 오히려 산출한다. 우리의 언어적 접속이 우리의 삶에 형태를 보여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우리를 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언어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산출하는 과정적 존재로서 존재한다. 이 공동체개체발생적 접속 안에서 우리는 이미 전부터 있어온 준거점도 아니며, 한 기원을 준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내는 언어적 세계의 형성과정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앎의 나무 261~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