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의 <생활속의 유식30송>

유식 [이름이 짓는 법화]

T1000.0 2020. 1. 28. 19:46

1장.

1.

깨어 있게 되면 중생의 조건이 바뀌는데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은 우리를 중생의 조건인 아와 법의 이름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반대로 우리 중생의 삶은 갖가지 이름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난의 조건'에 의해 변화하는 형상과 소리와 맛 등과 만나는 세계를 고정된 틀로 연상시키는 기능을 이름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법화라고 합니다. (26)

유가 수행자들은 선정과 현실 체험을 통해서 삶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변화의 이면에 변화하지 않는 아와 법이 숨어 있지 않음을 여실히 알았습니다. 삶의 변화란 곧 앎입니다. 드러나 현상[현행]이나 드러나지 않은 흐름[종자]이나, 우리의 삶 자체는 항상 변화의 흐름일 뿐입니다. 유가 수행자들은 이를 통해서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는 이름의 속성을 파헤치고, 이름으로 만들어진 틀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고정되고 괴롭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정된 틀 속에서 우리가 자기의 소유를 늘리기 위해서 서로 다투는 장면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26)

이들 가르침은 부처님의 말씀을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적의적절하게 운용한 것입니다. 유식의 근본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 곧 '관계 속의 삶'을 '앎의 관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정된 관계가 아니라 '관계 속의 변화'가 앎으로 나타난 것이며, 나아가 '앎이 곧 삶'이라고 보는 것이 유식의 가르침입니다. 앎은 삶의 진솔한 모습이며 연기이며 열린 세계라는 것입니다.(26)

 

중생도 알고 불보살도 압니다. 다만 중생은 닫힌 마음으로 알고, 불보살은 열린 마음으로 압니다. '열린 마음의 흐름'은 우리의 참모습이며, '닫힌 마음의 흐름'은 중생이라는 전제조건에서만 나타납니다. 중생은 하나밖에 모르고, 불보살은 전체를 압니다. 고정된 틀은 하나로 결정되지만, 열린 세계는 다양한 변화의 앎이기 때문입니다. 열린 세계는 연기실상이며, 실상은 매순간 변화 속에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틀이 바뀝니다. 이와 같이 매순간의 유사한 바뀜의 흐름을 고정된 틀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이처럼 고정화하는 것은 의의 작용으로, 이것이 바로 생각의 세계입니다. 생각의 세계가 눈의 세계, 귀의 세계 등과 만나면서 그것까지 고정된 틀로 묶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의의 작용에 의해서 고정되는 데, 이것을 법화라고 합니다. (27)
[T. 의식이 눈을 뜨고 꾸는 꿈인 이유는, 고정되지 않는 흐름을 고정된 틀로 보기 때문]

 

2. 흐름 ,즉 연기

 

닫힌 마음에서 법화가 일어나고, 이 법화에 의해서 마음은 더욱 닫혀 갑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이 갈수록 문제투성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틀로써는 삶을 제대로 볼 수 없는데, 이것은 단지 하나의 '만남의 조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식을 공부하는 목적은 삶의 고정된 틀을 버려서 '자비와
지혜의 열린 세계'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인, 앞에서 말한 여섯 세계를 놓치지 않고 잘 관찰하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고정된 틀을 알게 되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속에 열린 세계가 항상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법화는 늘 '만남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며, 이 또한 앎의 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앎이 있는 곳에는 항상 '닫힘과 열림이 더불어' 있습니다. 닫힘, 즉 중생이 있는 곳에 열림, 즉 부처님의 세계가 있습니다. 고정화된 언어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서, 만남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흐름[연기]을 여실히 보아야겠습니다.(27)

 

우리의 삶은 연기실상인 앎[識]의 세계로서 모두 함께 어우러져 있는 흐름입니다. 우리의 삶은 앎 자체의 변화인 흐름만 있으며, 이것이 유식성입니다. (28)

 

3.

 

언어는 감옥이 아닙니다. 언어는 하나의 존재 형식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입니다.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는 단순한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다른 공간이, 즉 언어를 넘어서는 [초월하는] 어떤 공간이 - 설령 그곳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할지라도  - 존재한다고 믿도록 만듭니다. 나는 그렇게 가정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어를 넘어서 존재하는 어떤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뜻합니다. 정말이지, 그와 비교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세요. '만일 모든 것이 우주의 일부라면, 우리는 도대체 그 우주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 대답은 자명합니다. '내가 가는 곳이 모두 우주이다.' 우리는 분리할 수 없이 더불어 움직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