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성찰[모름과 앎]
1.모름의 모름
2.앎의 앎
우리는 모른다. 우리의 잘못은 '모른다'는 걸 잘못 알고 있는 데 있다. 구분하자면 잘못 알고 있는 것, 이것이 문제의 무지다.
잘못 알고 있는 무지.
우리가 보는 실재는 우리가 보는 실재다. 우리가 보지 않는 실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 저기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는 이미 거기 있다고 전제하는 실재다. '거기 있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지?' '내가 보니까.'
"감각을 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절대 알 수 없고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원인들을 절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원인들이 아니라 결과들이다. 다르게 말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산출하는 실재다.
문제는 알 수 없음의 근원적인 모름의 자리를 목적인이란 환상으로 메우는 별개의 무지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잘못 알고 있는 무지이다. 우리는 근원적인 모름의 자리에 목적인을 끼워넣고 전생을 끼워놓기도 하고 팔자를 끼워놓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인들을 모를 뿐이다.
이 모름을 모름으로 나두자. 이러할 때 모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인과법칙에 매달려 이 모름을 그냥두지 않는다. 이 모름을 이용해 타인을 지배하고 소외시키는 역사를 경험해 왔다.)
2.
우리가 사는데 중요한 것은 앎의 앎이다. 사물은 사물일 뿐이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 사물이 크다 작다는 그 자체로 정해져 있지 않다. 작다는 크다와 상대할 때 나타난다. 다이너마이트는 폭약이다. 이 앎이 어떤 인연을 따르냐에 따라 다이너마이트는 사람을 죽이는 전쟁의 도구로 또는 사람을 살리는 구출의 도구로 쓰일 것이다. 이 앎의 앎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있다. 되집어보면 앎의 앎은 모든 게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게 한다. 독립적으로 정해진 실체는 본래 없다.
3.
여기 내가 이중 성찰이라 구분하는 이유는 첫번째 성찰이 너무도 당연해서 깨닫기 어렵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재의 전제'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경험하고 있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무지는 우리를 예속한다. 우리의 인생을 자유롭지 않게 한다. 욕구에 기초한 일원화된 세계로 빨아드린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을 뿐, 자연은 우리의 무지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