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관성의 차원
그래요. 크레타 섬에서 와서는 "나는 크레타사람입니다. 모든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을 합니다."라고 말한 에피메네데스를 생각해 보세요. 이 문장을 줄이면 "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가 되지요. "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합니까? 그를 믿을 수 있나요? 믿게 되면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말한 것이지요. 그가 진리를 얘기한다면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한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거짓말쟁이라고 말했으니까요. 그 시절부터 어제까지 논리학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것은 에피메니데스의 진술이 '의미있는 명제는 진리 아니면 거짓이어야 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금 이 문장은 우리가 그 문장을 진리로 여기게 됨녀 거짓이 되고 거짓으로 여기게 되면 진실이 되는 문장입니다.
혼란스럽게 하려는 에피메니데스의 시도는 의미 없는 뭔가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크레타 사람이 진리를 말하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연관적인 진술들이 이런 방식으로 특징 지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진술들이 긍정에서 부정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계속 옮겨가도록 강제한다는 이유로 의미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작은 도시에 살명서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면도해 주는 유명한 이발사의 패러독스가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면도할까요? 만약 그가 스스로 면도를 한다면 그는 자신을 면도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 사람만을 면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면도해야 합니다. 그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면도해야 하니까요. 버트란트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저술한 <수학원리> 서문에서도 그런 시그이 자기연관적 진술들은 분명히 금지됩니다. 이 두 명의 탁월한 논리학자들에게는 기묘한 패러독스를 낳는 것이 다름아니라 그러한 자기연관성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확실해 보였습니다. 이 말은 엄밀하게 볼 때 '나'라고 하는, 늘 자기 연관성을 구축하는 이 단어도 더 이상 사용되지 말아야 함을 얘기합니다. 정말 기묘하지 않습니까? (발명품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