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나무>

적어도 세살까긴 엄마가 아기를 키워야하는 이유. [신경계의 상호작용]

T1000.0 2020. 4. 29. 20:43

유기체에게 상호작용의 역사란 구조변화의 역사다. 유기체가 어떤 첫 구조에서 출발하여 이런저런 변화를 거치는 동안 신경계는 유기체가 띨 수 있는 상태들의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이 변화에 참여한다.
갓 태어난 새끼양을 몇 시간 동안 어미로부터 떼어 놓았다가 다시 돌려보낸 뒤 관찰해보면 새끼양은 일단 정상으로 발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잘 자라서 뛰어놀며 어미를 따라다니는 새끼양한테서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어린 양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관찰해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다른 어린 양들은 머리를 맞부딪치면서 이리저리 뛰고 장난치길 좋아한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 어미 곁을 떠나 있었던 새끼양은 그렇지 않다. 장난칠 줄도 모르고 그것을 배우지도 못한다. 그리고 동떨어져서 혼자 지낸다. 이 새끼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도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 책에서 살펴본 것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신경계의 역동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신경계의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새끼양이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은 어미 곁을 떠나 있었던 결과 신경계가 다른 양들의 신경계와 다르게 되었음을 뜻함에 틀림없다. 어미양은 새끼를 낳으면 곧바로 몇 시간 동안 새끼의 온몸을 쉬지 않고 핧아내는데, 우리가 그 둘을 떼어놓음으로서 이 상호작용을 막은 것이다. 또 이와 맞물린 촉각적, 시각적 자극은 물론 아마도 온갖 화학적 접촉까지 막은 셈이다. 핥아내기라는 단순한 상호작용이 이것과 거의 상관없이 보이는 결과들로 이어진 신경계의 구조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이 실험을 통해 증명된 셈이다. (앎의 나무 147)

모든 생물은 특별한 단세포 구조로 삶을 시작한다. 따라서 생물의 개체발생이란 끊임없는 구조변천인 셈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생물이 삶을 시작해서 죽기까지 자기가 속한 부류의 정체 및 자신과 환경의 구조접속을 보존한 채 겪는 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체발생은 생물과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역사 속에서 상호작용이 유발하는 생물의 구조변화를 통해 선택된 경로를 밟는다. 이것은 새끼양에게 일어난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새끼양의 예는 개구리의 예처럼 많은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정상의 경우와 비교해 병적인 것으로 드러난 구조변천을 '선택'했다고 기술될만한 일련의 상호작용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2.

1922년 인도 북부 벵골 주의 한 마을에서 두 인도 소녀가 늑대 가족의 품에서 구출되었다.(또는 강제로 떨어져 나왔다.) 그들은 그동안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구출'당시 그들은 각각 여덟살과 다섯 살쯤 되었다. 작은 아이는 발견된 뒤 얼마 안 있어 죽었고 큰 아이는 다른 고아들과 함 께 10년쯤을 더 살았다.
발견 당시 그들은 두 다리고 서서 걷지 못했지먄 네 다리로 빨리 달리 수는 있었다. 당연히 말을 못 했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날고기만 먹으려 했고 밤에 활동적이었으며 사람과 접촉하기를 꺼리고 개나 늑대와 어울리기를 더 좋아했다. '구출' 당시 그들은 아주 건강했고 영양부족에 따른 정신박약이나 백치의 증세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늑대 가족의 품에서 떨어지고 나서부터 아주 우울해졌고 둘 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며 한 아이는 바로 죽고 말았다.
10년을 더 살았던 큰 아이는 먹는 버릇과 활동주기를 바꾸었다. 두다리로 걷는 법도 배웠지만 급할 때는 언제나 원래 상태로 돌아가 네 다리로 달렸다. 몇몇 단어들을 사용했지만 제대로 말할 줄 안다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이 아이를 '구출'하여 보살핀 영국 국교도 선교사의 가족들이나 이 아이와 꽤 가까이 알고지낸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아이가 정말로 사람답다고 느끼지 않았다.
결코 예외적이라 할 수 없는 이 사례에서 늑대소녀들은 비로 유전소질이나 해부학적, 생리학적 측면에서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사람다운 맥락에 완전히 들어올 수 없었다.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은 사람다운 맥락에 어긋나는 큰 아이의 행동방식을 고쳐주려고 했지만 그 아이가 자라온 '늑대다운'맥락에서는 그 행동방식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키플링이 지어낸 정글소년 모글리는 피와 살로 된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글리는 말을 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환경과 마주치지마자마자 곧바로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피와 살로 된 우리 인간은 오로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우리가 삶을 통해 산출한 세계 안에서만 낯설지 않다. (앎의 나무 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