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이 아니라 산출의 관점
맞습니다. 저에게는 누가 결국에 옳으냐 하는 끔찍한 질문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편협함(불관용)과 싸움만이 지배하는 그런 논의에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다른 생각(사고)을 논박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는 결국에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른 관점을 변호하고 싶고, 우리가 로렌츠의 문장들을 뒤집을 수 있고, 말해진 모든 것을 거꾸로 세울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 우리 스스로를 우리들의 세계를 발명하는 사람 혹은 산출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그때 적응의 문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런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발명할 수 없고,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을 어떻게 발명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이미 적응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관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관점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 모든 현상의 아비요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발명품 34)
2.
생명체는 (그것이 개체발생적인 자연표류를 하던 계통발생적인 표류를 하던) 경쟁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만나 적응을 보존하는 개체가 살아남는 것이다. (앎의 나무 224)
3.
산다는 것은 적응보다 산출의 관점. 이미 적응을 보존.
4.
작업상 독립적 체계인 유기체와 환경의 구조접속을 바탕으로 유기체가 환경 안에서 역동적 체계로 계속 존재하는 것에 주목할 때, 이런 존재의 기초는 유기체와 환경의 구조적 양립, 곧 우리가 적응이라 부르는 것인 듯하다. 반면에 생물이 환경과 파괴적 상호작용을 주고 받은 결과로 생물이 자기 생성개체로서 해체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 생물이 적응력을 잃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개체가 환경에 적응했다는 것은 개체와 환경의 구조접속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바꿔말하자면 개체의 구조변천사인 개체발생이란 조직을 유지한 채, 따라서 또한 적응 관계를 유지한 채 일어나는 구조변화의 표류인 셈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자기생성의 보존과 적응의 보존은 생물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러므로 생물이 환경 안에서 겪는 개체발생적 구조변화는 언제나 환경의 표류와 어울리는 구조적 표류일 것이다. 생물과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역사적 전개를 바라보는 관찰자에게 이런 표류는 환경이 '선택'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앎의 나무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