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1000.0 2012. 5. 24. 18:12

< 전도몽상(轉到夢想)에 관한 주석 >

 

 

 

 이 글은 '들뢰즈가 쓴 <스피노자의 철학>의 1.의식에 대한 평가절하(사유에 대한 옹호): 유물론자 스피노자(p32~38)'을 불교적 용어와 결합시킨 편집글이며 초점은 '전도몽상(뒤집혀진 꿈같은 생각)'에 대한 스피노자적 이해[혹은 증명]에 있다.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般若心經 반야심경, 요약>

 

 

 

 

의식은 환상의 장소이다.

의식의 본성은, 결과를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의식은 두 눈 뜨고 꾸는 꿈일 뿐이다.

의식은 순수하게 이행적이다. 

 

 

 

1. 원인의 질서: 인연

이것은[무의식의 발견] 물론 의식이 환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원인들의 질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연장[각주:1] 속의 각 신체, 사유 속의 각 관념과 각 정신은 이 신체의 부분들, 이 관념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독특한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를 <만날> 때,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만날 때, 이 두 관계는 결합되어 보다 큰 능력을 갖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든가,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체하여 그 부분들의 결합을 파괴하게 되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 살아 있는 부분들의 전체는 복잡한 법칙들에 따라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따라서 원인들의 질서는 끊임없이 자연 전체를 변용시키는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이다. 그러나 의식적 존재들인 우리는 이러한 구성과 해체의 결과들만을 받아들인다.  

주석: '끊임없이 자연 전체를 변용시키는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연이다. 복잡한 인연의 질서에 관해 우리는 무지하다. 다만 인연의 질서가 생성하고 해체한 결과만을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2. 슬픈 정념: 화(火)

우리의 신체가 한 신체를 만나서 그것과 결합될 때, 즉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반대로 한 신체 혹은 한 관념이 우리의 고유한 결합성을 위협할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것>만을,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는 것>만을, 즉 우리 신체에 미친 한 신체의 결과, 우리 영혼에 미친 한 관념의 결과만을 받아들이는 그러한 상황에 우리는 놓여 있다.

주석: 예컨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화는 슬픔처럼 우리의 고유한 결합성을 위협할 때 일어나는 결과이다. 그런데 화가 일어나는 원인[원인의 질서, 인연]에 대해선 우리는 모른다. "억울함이 있다는 것은 내가 지은 바 인연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지, 누가 나를 억울하게 한 게 아니다.(법륜스님의 <깨달음> p35)" 

 

3. 무명(無明)

자신의 고유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신체, 자신의 고유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영혼, 그리고 각자의 고유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다른 신체들과 다른 관념들이 각각 무엇인지, 그리고 이 모든 관계들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규칙들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의식의 주어진 질서 속에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가 사물들을 인식하는 조건들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의식을 갖는 조건들 때문에 우리는 부적합한 관념들, 혼란스럽고 절단된 관념들, 즉 자신들의 고유한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결과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주석: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동시에 그와 평행하게 '의식을 벗어나는 정신의 능력'인 무의식의 규칙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무명은 불가피하다. 우리는 인식자이면서 조작자이기에 무명에 관해서 인식하려하면 그 행위 자체가 조작이다. 인식하려 할수록 조작되고 다시 조작할수록 인식에서 멀어진다. 마치 눈으로 눈을 보지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무명을 알 수 없다. 우리는 무명을 알 수 없기에 무명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결과를 결정할 수는 없다.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만을 가질 뿐이다.      

 

4. 전도몽상

어떻게 평온한 의식이 불안을 가지게 될까? 어떻게 아담은 자신을 행복하고 완전하다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삼중의 환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1) 목적인이라는 환상: 의식은 결과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물들의 질서를 전도시킴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메운다. 의식은, 한 신체가 우리 신체에 미친 결과를 외부 신체의 작용의 목적인으로 만든다.

2) 자유명령이라는 환상: 이제 의식은 자신을 제1원인으로 간주하게 되고, 신체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내세운다. 

3) 신학적 환영: 의식이 자신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제1원인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의식은, 지성과 의지를 갖고 있는 신, 목적인과 자유 명령에 의해 행위하며, 영예와 처벌에 따르는 세계를 인간에게 마련해 놓은 신을 내세운다.

의식은 환상들로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의식은 자신을 구성하는 삼중의 환상, 즉 목적인의 환상, 자유의 환상, 신학적 환상과 분리 불가능하다. 의식은 두 눈 뜨고 꾸는 꿈일 뿐이다.

주석: 의식은 환상의 장소이다. 게다가 환상은 삼중의 환상인데, 1)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뒤집힌 전도. 2) 전도된 의식을 제1원인으로 삼아 행동하는 의식의 분별. 3) 그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할 신에 대한 몽상(도덕성). 이 3중의 환상이 의식을 구성하며 전도몽상을 이룬다. 의식은 두 눈 뜨고 꾸는 꿈, 전도몽상이다. 

 

4.  의식의 원인, 코나투스

의식 자체도 원인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욕구>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것은 단지 욕망에 대한 유명론적 정의일 뿐이며, 의식은 욕망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한다.<우리가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하고 그것을 원하고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원하고 욕구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욕망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에 이르러야 한다. 이 정의는 동시에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의식이 욕구의 과정에 새겨지게 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욕구는 각 사물이, 즉 연장에 속하는 각각의 신체와 사유에 속하는 각각의 영혼, 각각의 관념이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 코나투스는 우리가 만나는 대상들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매 순간 대상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변용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결정인자로서의 이 변용들이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의 원인이 된다. 변용들의 운동과, 즉 우리가 만난 사물이 우리와 결합하는가 아나면 반대로 우리를 해체하는가에 따라 우리를 보다 큰 완전성으로 혹은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시키는 운동(기쁨과 슬픔)과 분리될 수 없는 완전성으로 혹은 보다 적은 완전성에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요컨대 다른 신체들 혹은 다른 관념들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코나투스의 변이들과 결정들의 증거인 이 이행의 지속적인 감정으로 나타난다. 나의 본성에 적합한 대상을 통해, 나는 우리, 즉 그 대상과 나를 아우르는 보다 우월한 총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나와 적합하지 않은 대상은 나의 결합성을 해치며, 나를 부분들로 분해함으로써 결국에는 나를 구성하고 있던 관계와 양립할 수 없는 관계들(죽음)로 들어가도록 만든다. 

주석: 의식 자체의 원인은, 코나투스(지속하려는 욕구)가 다른 대상들을 만나 생기는 변용, 예컨데 입의 욕구가 변용되는 [음식을 만날때의] 식욕과 [사랑을 나눌때의] 성욕같은, 이 변용들이 지속하려는 욕구(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의 원인이 된다. 의식은 자신의 원인인 변용을 통해 바뀌는, 즉 신체나 정신을 보다 큰 안정성으로 이행하는 기쁨, 보다 적은 안정성으로 이행하는 슬픔에서의 '이행'을 담당한다. 의식은 주체가 아니며 즉 의식이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행 그 자체이다.

 

5. 알아차리기: 의식은 순수하게 이행적이다.

의식은 이행과 같은 것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보다 적은 능력의 총체로부터 보다 큰 능력의 총체로의 이행 혹은 그 역으로의 이행에 대한 감정이다. 의식은 순수하게 이행적이다. 그러나 의식은 절대적 전체의 특성도, 특별한 어떤 전체의 특성도 아니다. 의식은 정보의 가치만을 가지며 그것도 필연적으로 혼란스럽고 절단된 정보만을 갖는다.

주석: 의식은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원인은 모르지만 그 결과 자체는 어떤 이행["적은 능력의 총체로부터 큰 능력의 총체로의 이행 혹은 그 역으로의 이행"]에 대한 정보를 내포한다. 이 정보는 이행의 가치만을 가지므로 내포하는 의미를 알아차리는데 의미가 있지, 이를 원인으로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무지의 소행이다.- 의식을 뒤집힌 꿈같은 생각, 꿈인 줄 알아차리기[의식에 대한 평가 절하], 또는 꿈깨기를 위한 사유의 옹호: 꿈이 꿈인 줄 알아차리면 꿈에 메이지 않는 삶을 산다. 

 

  1. 데카르트의 실체개념으로 '연장'은 물질이 공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참고로 데카르트의 실체는 두 개[이원론]인데 나머지 하나는 '사유'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