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작가시점
생물물리학자인 하인쯔 폰 푀르스테르는 미국 인공지능 학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 적이 있습니다. "객관성이란, 관찰하기가 주체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하는 주체의 망상이다. 객관성에 호소하는 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인기가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60년대 후반에 하인쯔 폰 푀르스테르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말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그 말은 관찰이 관찰 대상과 분리될 수 있다는 신념을, 관찰자의 육신적 존재는 부차적이며, 관찰하기란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단지 기록하는 단순한 과정이기 때문에 그 육신적 존재는 쉽사리 대체될 수 있다는 신념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관찰자 자신의 행위들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죠. 그러한 신념에 의하면 어떤 진술을 확증하기 위해 이용되는 것은 외부로부터 오고 그것은 실재나 진리에 연관됩니다. 그 어떤 판단의 근거도 관찰자인 그 존재에게 외부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통상적인 결론은 아무도 자신들의 판단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판단들이 개인적인 편견이나 흥미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있음에서함으로 56>

제가 볼 때에 선생님의 성찰들은 그와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각이나 우리의 주장에 대한 책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지요?
맞습니다. 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통찰에는 불가피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일단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깨닫고 있는지 그리고 또한 이 깨달음을 깨닫고 있는지를 우리 자신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체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관찰자라는 개념은 관찰하기의 작동을 연구하고 '이해의 이해'가 가진 순환성을 직시하는 과제를 제시합니다. 결국 관찰하기를 관찰하는 것은 관찰자입니다. 두뇌를 설명하고 싶어하는 것은 두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재귀적 문제들이 받아들여질 수 없고 또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제안은 이 순환적인 상황을 맨 처음부터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또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과 우리 자신의 행위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활동들을 통해 대답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수단으로 만들자는 겁니다. 요점은 그 작동들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명되어야 하는 체험들을 낳습니다. (함으로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