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과 나쁜 것이 본래 없다.
스피노자 <에티카> 3부 정리 39.
주석. 여기서 나는 선을 모든 종류의 기쁨과 기쁨을 가져오는 것, 그리고 특히 온갖 종류의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악을 모든 종류의 슬픔, 그리고 특히 열망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이전에 (정리 9의 주석에서) 우리가 밝혔듯이 우리는 사물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욕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욕구하는 사물을 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혐오하는 사물을 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고 무엇이 가장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따라서 탐욕스러운 자는 부의 축적을 가장 좋은 것으로 판단하며, 가난을 가장 나쁜 것으로 판단한다. 야심적인 사람은 무엇보다도 대중의 갈채를 바라며, 그 무엇보다도 치욕을 두려워한다. 질투하는 자에게는 타인의 불행만큼 유쾌한 것이 없고, 타인의 행복만큼 불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어떤 것이 선인지 아니면 악인지, 유용한지 아니면 유용하지 않은지를 판단한다.
T.
1.
"우리는 사물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욕구하는 것이 아니고[좋은 것과 나쁜 것이 본래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욕구하는 사물을 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일체유심조]"
성경에도 이르기를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복음 6:21)고 한다. 보물이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욕구하는 사물이라면, 길가의 돌도 보물이 될 수 있고, 나무토막도 보물이 될 수 있다. (목불木佛을 땔감으로 쓴 단하소불丹霞燒佛 이야기처럼)
2.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고 무엇이 가장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의해 분별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마음에 의해.
스피노자는 "감정을 제어하고 억제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감정에 종속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운명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종종 강제될 정도로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에티카 4부 서론)라고 하는데, 이를 새겨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따로 없고 나의 감정에 의해 판단함을 자각함으로써
필요할 시에(인연을 따라)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더 좋은 것을 따르도록
운명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즉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