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삶
중도를 성찰한 삶은 중심 잡힌 삶을 산다.
[표상주의와 유아론도 아닌, 상주론과 단멸론도 아닌, 쾌락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닌 중도], 중도의 길잡이인 이중보기, 환상처럼 보기를 통해 어떤 집착도 하지 않으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자신의 신체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든다.
1.
니체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신비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서 그것들은 도덕적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결과들>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 검소, 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에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 검소, 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p10)
2.
나는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나는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었고 내 자신을 그것들과 부당하게 동일시했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죽음과 마주침으로써 나는 내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순간적임을, 오직 변이일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옹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성찰적이게 되었고 덜 교조적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모든 세속적인 유대를 초월하는 영광스런 존재'로 서술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은 너무 강렬했고 그래서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함으로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