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으로의 마술적 포획
도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과 지각의 일치(상응)를 그토록 절대적으로 요구하게 만드나요? 사실 우리 눈앞에 아름다운 붉은 머릿결을 가진 소녀가, 붉은 주사위가, 혹은 붉은 식탁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지각하고있다는 사실이며 그 이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우리의 감각이 세상 속의 대상들을 확증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탁자를 보고는 가까이 다가가서 나무를 만져보고 그리고는 믿습니다. 탁자를 느낀 촉감은 탁자의 존재를 검증하며 눈이 받아들인 것을 최종적으로 검증한다고. 확증에 대한 이같은 생각은 내게는 아무 의미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탁자로 확인되는 어떤 실재의 존재 자체는 이미 전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말은 검증에 대한 그러한 사고는 이미 존재론적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런 사고는 어떤 물건이 '저기 바깥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존재 유무를 검증하고자 하는 그 어떤 것이 이미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말로 하자면, 확증하려는 사고방식을 느낌들의 상호연관에 대한 생각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우리는 뭔가를 보고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의 느낌들의 상호연관과 신경관련 프로세스들의 총체[내가 지은 인연의 총체, 마음]가 우리가 탁자, 주사위,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여자 친구라고 부르는 세상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느낌들의 상호연관은 제가 볼 때 당신이 세계의 풍성한 뉘앙스라고 말한 것의 전제입니다. 느낌들은 모두 지극히 다양하기 때문에, 느낌이 있어서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지각의 풍성함이 생겨나고 우리에 의해 향유되는 세상의 멋진 화려함이 있는 것입니다. (발명품 31)
T.
"도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과 지각의 일치(상응)를 그토록 절대적으로 요구하게 만드나요?"
우리는 어찌해서 세상과 지각을 동일시하는 확실성에 대한 집착에 이토록 집요한 것일까? 대체 어떻게 이 마술같은 포획이 일어나는 걸까? 거기 있다는 게? 너무 당연해서? 너무 자연스러워서? 내가 보니까? 몰라서?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보니까!' 우리는 너무 당연해서 '몰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마술같은 포획을 풀 열쇠가 또 '내가 보니까!"라는 것이다. 아, 환상적이다. 환상적인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