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은 나의 신체말고는 가능하지 않다.
1.
우리는 그와 같은 절대적 실재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와 동시에 '그것[물자체]을 알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불합리한 개념적 곡예입니다. 하지만 내가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때, 나는 또 다른 핵심적인 질문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실재, 진리, 그리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 체계를 변화시킵니다. 이 질문은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외부 실재의 연구와는 더 이상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로 작동함으로써 관찰자의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언어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언어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요컨대 우리 자신의 바깥에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우리가 접근할 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함으로 42)
2.
에티카 2부 정리 26 증명 : 인간의 정신이 자기 신체의 변용의 관념에 의해 외부의 물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정신이 그것을 표상한다고 말한다(정리 17의 주석 참조). 게다가 정신은 다른 방식으로는 (정리 26에 의해) 외부의 물체들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표상할 수 없다. 따라서 (정리 25에 의해) 정신은, 외부의 물체를 표상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에 대한 타당한 인식을 갖지 않는다. Q.E.D
3.
나는 우리의 체험들을 낳고 형성하는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작동들을 설명하는 바로 그 행동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서술하는 대상들과 실체들로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함으로 53)
4.
이것이 결정적인 점입니다. 내 연구의 대상, 그와 동시에, 불가피하게, 내 연구의 수단은 관찰자입니다. 실로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나누는 전통적인 분리를 대체하는 순환적인 상황 속에 얽혀 있습니다. 나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나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아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를 내 사고의 출발점으로서 이용합니다. 어떠한 존재론적 전제도 두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단지 관련된 질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어떠한 고차원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어떠한 존재론적 토대도 없습니다. 어떠한 보편타당한 정당화도 없습니다. 관찰자는 관찰하며, 무엇을 보며,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합니다. 관찰자는 자신이 '하는' 것을 '합니다.' 그에게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념의 문제이지 확실한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핵심적인 아포리즘을 좀 더 면밀히 고찰해 보면 약간 당황스러움을 느낍니다. 이러한 공준은 너무 단언적이고 박반불가능해 보입니다. 물론, 그리고 지접적으로 명백한 일이긴 합니다만,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입니다. 이 통찰을 피해가는 길이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던 상황에서 그와 같은 진술이 논박될 수 있을까요?
오직 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겠조. 신은 관찰하지 않고도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신이건 남신이건) 신이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인간으로 작동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신의 능력들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말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습니다. (함으로 43)
5. 내 생각에는...
당신이 그렇게도 파괴적이라고 여긴 그 진리이념이 어떻게 가볍고 유연하고 관용적인 방식으로 비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군요. 진리독단론에 대한 비판이 사람을 독단적인 반독단론자로 만들지 않을 수도 있군요. 그러니까 유연성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방법 혹은 언어를 사용해야 하나?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게는 유머러스하고 장난기 어린 체스처가 중요합니다. 재미, 유머 그리고 위트가 제게는 가능성들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파멸적인 사고의 범주들이 뒤로 물러나게 만들고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그러한 놀이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제 학생들과 약속했습니다. '실재' '사실은' '진리' '객관성'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몇 달러씩 내서 그 돈을 모아 함께 사용하기로 말입니다. 2달러를 지불하기만 한다면 당연히 실재에 대해서 얘기해도 되었지요. 그리고 진리에 대해 언급하면 그건 좀 비쌌어요. 이런 간단한 놀이의 도움으로 그런 표현들이 갖는 독재적 힘에 대한 주의가 생겨났고 이런 방식으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법을 배웠지요.
그 다른 언어는 어떤 모습인가요?
여기서는 외적 준거를 포기한 다른 사람과 저와의 대화가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잠시나마 '세계에 대한 그런 관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신이며 우리가 관련을 맺는 것은 밖에 있는 이러 저러한 객관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러면 뭔가를 말하는 사람의 그때그때의 개성이 부각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렇다'라는 일반적인 판단이 아니라 '내 생각에는 ~'으로 시작되는 문장이 생겨납니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내 생각에는 ~'이라는 자기준거적인 연산자를 사용하게 되며 '그것은 ~이다.'라는 외적으로 존재하는 연산자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유롭고 멋진 대화를 허용하는 완전히 다른 관계가 생겨나게 되는 거지요. (발명품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