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욕망, 최고의 행복
스피노자, <에티카> 4부 부록.
1. 우리의 모든 노력 또는 욕망은 우리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나오는데, 이는 그것들의 가장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우리의 본성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나오든가, 아니면 우리가 다른 개체들 없이 그 자체에 의하여 타당하게 파악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분인 한에 있어서 나온다.
2. 우리의 본성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들은, 타당한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파악되는 한에 있어서의 정신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여타의 욕망들은 사물을 타당하지 않게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의 정신에만 관계되며, 그것들의 힘과 성장은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의 힘에 의하여 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전자는 능동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고, 후자는 수동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전자는 항상 우리의 능력을 나타내는 반면, 후자는 우리의 무능력과 불완전한 인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3. 우리의 능동(즉, 인간의 능력 또는 이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욕망들)은 항상 선이지만, 그 외의 욕망들은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4.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것은 우리의 지성 또는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이것에만 인간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이 있다. 왜냐하면 지복은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생기는 정신의 만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신 및 신의 속성들 그리고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나오는 인도되는 사람의 궁극적 목적, 즉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욕망들을 제어하려고 애쓰도록 하는 최고의 욕망은 그 자신 및 그의 인식의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타당하게 파악하도록 그를 이끄는 욕망이다.
1.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작품이 보여야 한다는 것에 조금은 신경을 쓴다는 얘기가 됩니다.
내가 신경을 쓴다고 할 때에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관심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든 이미지 중 일부는 내게 일종의 잠재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이미지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데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논리적으로 따져 본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를 놓고 사는 동안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은 그 답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할 테고, 나 역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만이 유일하고도 훌륭한 비평가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서 마지막 2행 연구는 그가 죽고 나서 한참 뒤에도 이 시구들은 여전히 읽힐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대담,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227)
2.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혹 어떤 중생이 이러한 말씀(章句)을 듣고서 진실이란 믿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런 말을 말라. 여래가 멸도(滅度)한 뒤 나중 오백년(後五百年)에도 계(戒)를 지키고 복(福)을 닦는 이는 이 말씀에 믿음을 내어 이것을 진실이라 여기리니, 이런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셋․넷․다섯 부처님께만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백,천만 부처님께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는 잠깐 동안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것이니라.』
<금강경>
T.
세잌스피어 또는 부처는 자신이 죽고 난 후 5백년 후에도 자신의 시가, <금강경>이 여전히 읽힐 것이라 자신한다. 왜 그런가? 나는 그 이유가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우리는 최고의 행복을 욕망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금강경>은 우리의 지성 또는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고자하는 욕망이다. <금강경>의 핵심과제는 이렇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무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느니라."
오로지 이것에만 인간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이 있다.
나는 스님들의 물리적인 출가가 최고의 욕망, 최고의 행복과 관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