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의 이해
1.
신호, 설명, 생각 혹은 이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해나 의미를 체험한다는 것은 어떻게 기술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질문이 갖춘 논리는 특별하군요. 당신은 이해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당신 자신의 회귀성(이해를 이해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회귀적으로(이해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이해하려고)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 듣고자 하는 것은 제가,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두 가지 기술(서술)간의 의미론적 연관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설명'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하는 거죠?
이해를 체험한다는 것을 신경생리학적인 혹은 시적인 관점으로부터 특징지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짧은 일화로 답을 해 보겠습니다.
이 예를 해석하자면, 이해와 파악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속한 문화나 유산에 기반하여 이미 알고 있고 기대하고 있는 것과 말해진 것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형식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위의 예를 가지고 말하자면 (당신과 당신 아들이 했던) 설명의 방법 혹은 방식이 그 아프리카 학생이 설명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형식에 맞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학생에게 익숙했던 구문론적 구조의 설명이 행해졌을 때 비로소 그는 이해를 하게 된 것이고요.
감사합니다.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네요. 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해나 의미를 체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신이 아주 멋지게 기술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이 필요로 했던 바로 그것을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받아들어질 만한 설명, 당신에게 하여금 이해를 이해하게끔 만들어 주는 그런 설명을 해냈습니다. 위의 일화에 대한 당신의 해석은 제가 정리했던 해석학적 원리에 대한 멋진 보기입니다. 제가 정리한 바 있던 해석학적 원리는 '화자가 아니라 청자가 (화자에 의해 행해진) 진술의 의미를 규정한다'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화자가 어떤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고 청자는 화자가 말한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근본적인 잘못입니다. 저나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기묘한 소리를 해석하여 그 소리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청자입니다.
2.
이 얘기는 시냅스에 대한 얘기도 아니고 전기 자극이나 어떤 시인의 은유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저와 저의 아내가 한번은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서 온 한 학생을 집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그나티우스이고 일리노이대학에서 농업을 공부하고 있었고 우리 집에서 잠시 살았으며 이보부족원이었습니다. 이보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에 사는 부족으로서 그 학생의 책상에서 저는 어느 날 부족장의 흑백사진을 한 장 보았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우리는 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작은 사진기를 선물했습니다. 그는 아주 좋아했고 필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첫 번째 사진으로 받아서는 흥분해서 제게 와서 말했습니다. "저를 속였어요. 제 책상 위에 있던 족장님 사진을 컬러필름으로 찍었는데 현상소에서 제가 받은 사진은 흑백입니다." 제가 이그나티우스에게 그렇지 않아, 너의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이 흑백이잖아라고 말해 줬습니다. 그랬더니 이그나티우스는 자기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하지만 그게 컬러필름이니까 자기를 속였다고 말했습니다. 물리학자인 제 아들 토미가 그때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어려운 양자역학적 설명을 해 주었어요. 그런데도 이그나티우스는 자기는 모든 것을 잘 이해하지만 자기를 속였다고 되풀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물리학적 설명도 그를 이해시키지 못한 것이지요. 어느 날 나이지리아에서 교사로 일했던 젊은이가 우리를 방문했는데 컬러필름으로 찍힌 흑백사징이 갑자기 컬러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그나티우스가 결코 속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려 했던 우리의 시도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얘기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젊은 교사는 이그나티우스를 향해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It does not work! 그러자 이그나티우스가, "아,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다, p158 - 편집은 인용자)
3.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네요." 설명은 설명을 필요로 하며 설명이 끝나는 지점은 "당신은 당신에게 받아들어질 만한 설명, 당신에게 하여금 이해를 이해하게끔 만들어 주는 그런 설명을 해냈습니다. 위의 일화에 대한 당신의 해석은 제가 정리했던 해석학적 원리에 대한 멋진 보기입니다. "
4.
앎은 매개되는 것이 아니다. 앎은 설명을 통해 전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일반적인 믿음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앎을 매개한다는 생각에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앎은 매개되는 게 아닙니다. 앎(지식)이라는 것은 어떤 유기체에게 (누군가에게) 특정의 결과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설탕, 담배, 커피와 같이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는 그런 대상, 물건 혹은 사물에 파악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에는 이와 반대로 앎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 자신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앎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발생 혹은 창조의 과정이 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5.
인과론적 사유에 의해 추방된 설명원리들
"우화, 풍자, 유추, 이야기 등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은 암덩어리와 같이 도처에 잠입한 인과론적 사유에 의해 유감스럽게도 추방된 설명원리들입니다. 예수도 자신의 말에 강조와 권위를 부여함에 있어서 인과성에 대해서 말한 적 없습니다. 그는 시각적인 표현들로 말했고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낙타와 부자들 간의 어떤 인과적 관계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추와 우화 그리고 이야기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