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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계연구소

교제의 즐거움

T1000.0 2019. 11. 27. 23:03
1.

원효는 이제야말로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천민들이 사는 소와 부곡으로 거침없이 갈 수가 있었어요. 그들을 구제하러 간 것이 아니에요. 중생이라는 것은 본래 없습니다. 시비심을 일으키는 내 마음이 중생심이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그 순간 내가 바로 중생이지요.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구제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배우러 가는 것예요. 그래서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기 위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예전에는 '그들은 마땅히 구제 받아야 할 중생이고 나는 그들을 구제해야 하는 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꺼림칙해서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용기를 내서 그들을 구제하러 내가 그곳으로 간다.' 이렇게 생각해서 간 것이 절에서의 불목하니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구제할 중생이 본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거침없이 천민들이 사는 그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과 더불어 노닐고 그들한테서 배우려고요.
 (지금 여기 깨어있기 172)



2.

두 번째 태도는 나는 괄호 친 객관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의 감정적 기초는 다른 인간들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질문은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모든 시도가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길에 따르면 객체들과 존재의 체험 사이의 구분이 부정되지는 않지만 객체들에의 준거[참조]가 설명들의 기초는 아닙니다. 모든 설명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체험들 간의 정합성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자면, 관찰자가 모든 실재들의 기원이 됩니다. 모든 실재들은 관찰자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창조됩니다, 우리는 구성적 존재론들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모든 존재는 관찰자들의 '함'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존재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가 결코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고 무수한 가능한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실재들 각각은 완전히 정당하며 타당합니다. 물론 바람직한 정도는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변 인간들의 복종을 요구할 수 없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고 협력과 소통을 추구할 것이며,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 우리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간주하게 될 것인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주장은 만일 그것이 실재의 적절한 영역의 타당화 기준들을 충족시킨다면 참될 것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66) 

3.

그들은 '어쩌면' 괄호 친 객관성의 길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찰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차이들을 존중할 것이고, 자신들이 진리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즐길 것입니다. 그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차이나는 문화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가능한 실재들의 수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다양성은 공동체적 생활에 의해, 함께 창조한 문화들과 역사들에 의해, 공유된 이해들과 편견들에 의해 갇히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분병히 차이나지만[다르지만] 완전히 차이나지는[다르지는] 않습니다. (함으로 68)

4.

중생을 만들지 않고 본래 부처들과 나누는 교제. '그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과 더불어 노닐고 그들한테서 배우는'. 해서 한 중생도 구제할 바 없는 교제.
교제의 설레임, 그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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