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고 싶은대로 산다. 각자의 욕망대로 산다. 인연을 따라. 모두들 인연을 따라 중도를 행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다. 중도가 아닌 다른 대안은 어리석은 길이므로 그 길은 괴롭고 힘들다. 헌데 이 길을 누가 계속 가겠는가.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중도로 돌아오고 그 과정[윤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괴롭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 몰라서, 욕심 때문에, 어리석어서. 무지는 깨우쳐야할 당면 과제. 수행의 필요성. 세이코타 따든 잃든 모두가 시장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요. 어떤 사람들은 잃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그들은 돈을 잃음으로써 성공하는 것이죠. 『시장의 마법사들』p243 법륜스님 많은 분들이 저를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유로 못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만두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만두면 ..
한 인연의 문턱을 넘어 변화된 인연을 생성할 때 생산, 생산력, 능력이 생긴다. 능력은 능동적인 힘에서 생성되며 수동적인 힘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능력은 기쁨의 정념들과 관계하며 슬픔의 정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슬픔의 정념은 무능력이다. 능력에 기초해 영위되는 삶이란, 기쁨의 정념으로 충만한 행위와 변용에 기초해 능력이 더더 향상되는 삶이고 욕구에 기초한 삶은 고[苦]와 락[樂]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삶.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에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들뢰즈, p10)
색 자체가 공하다. 어떤 것도 그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체라고 보여지는 색은 있는 그대로의 공이다. 공은 곧 색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색 자체가 연기의 흐름, 관계 그 자체이며 연기적 흐름 그 자체는 공하다. 색 자체가 공임을 모르는 무지로 인해 괴로움이 생긴다. '무지로 인해' 우리는 색이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으로 '믿는다'. 이 때 이 무지로 인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일체를 마음이 짓는 바'라는 것을 성찰한다[일체유심조]. 이러한 성찰을 통해, 보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다름을 관찰하여,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나에게 보여지는 바가 있는 그대로가 아님을 보게 됨으로써 무지를 통한 무지를 통찰한다. 이로서 생득적으로[일체유심조] 무지를 안고 사는 우리는 보이는 색을 ..
우리는 의지가 약하다고 한다. 허나 실제로는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욕구와 반대인 경우다. 일어나고 싶은데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욕구가 일어나기 싫다는 것이고 의지는 욕구를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 의지는 욕구의 긍정과 부정 이외에 아무 능력이 없다. 의지와 다르게 정신력은 욕구를 의식하는 욕망이며, 이성에서 나오는 욕망으로 능력이다. 일어나기 싫은 욕구를 정신력으로 벌떡 일어나도록 잠재우는 힘[욕망]이다. 의지와는 별개다.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야 한다는 이성의 힘, 즉 인연과보를 의식하는 이성에서 생기는 욕망이, 벌떡 일어나게 한다. 스피노자는 에서 코나투스가 정신에만 관계되어 있을 때 의지라 불린다고 한다. 의지는 인간의 보존을 지속하려는 본성을 가지도록 결정되어 있으나 그것이 정신에만 관계되어 ..
의식의 환상은 내가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한다'는 자유의지는 원인들의 질서를 몰라 생기는 환상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다는 생각이 환상이다. 나는, 의지는 무상한 흐름의 만남 속에서 그 만남을 긍정할 것인지 부정할 것인지 선택할 뿐이다. 이 선택이 나라고 할 '나'를 형성하고 타자와의 차이를 만든다. 나는 분명 있되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무아. 공. 있는 그대로. 무아는 무상한 흐름이다. 이 변용에는 보다 큰 능력으로의 변용, 보다 많은 타당한 관념으로 변용되는 흐름으로 나아가는 형성이 있다. 이를 테면 꾸준한 형성이 만들어가는 '복리적 흐름'의 능력은 신체에 있어서나 사유에 있어서 어마어마하다. 그 기쁨이 [욕구에 기초한 행복과 비교 불가하게] 어마어마하다. 복리적 기쁨.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