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하인쯔 폰 푀르스테르가 갖추고 있는 체계적 이해를 밝혀 주었고, 동시에 내가 자기믿음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활동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이해를 완전히 신뢰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p262 그때 갑자기 번개가 가슴속을 후려치는 듯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 다음 몇 주 동안 모든 사람들이 마치 마술사의 환상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때부터 '나', 그리고 모든 현상들이 겉으로 보이는 방식을 인정하지 않으면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공..
정해진 것은 없고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 내 선택에 책임지는 것이다. 괴롭다는 것도 내가 만드는 것이니 괴롭지 않으려면 내 생각[사로잡힌]을 고집하지 말고 선택하여 책임지면 그 뿐이다. 있음을 본다가 아니라 본다는 것을 한다. '있음에서 함으로' "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 깨닫고 깨닫고를 깨닫는 것, 이제부터 다시 시작. 원효에게 있어선 해골물 깨달음. 이제부터 대안,방울,소성거사의 단계가 다시 시작. 보림.
1. 보세요. 여기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살아가고 있고,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은 색을 보고 따스함과 차가움을 경험하며, 꽃 혹은 매연 냄새를 맡으며 수많은 느낌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구성된 관계들입니다. 그것들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생겨납니다. 말하자면 음악을 듣는 일의 물리적 원인은 공기 중의 몇몇 분자들이 다소 느리게, 다른 분자들은 약간 빠르게 고막에 도달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음악이라고 말하지요. 색을 지각하는 것은 망막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몇몇 세포군이 여기서 색의 느낌을 산출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외부세계로부터 내부로 도달하는 것은 전자기적 파동이고 이것이 망막에서 자극을 발생시키..
맞아요. 바로 1965년에 나는 칠레로 돌아온 이후 조수로 일하고 있던 의학부의 저널에 짧은 논문을 썼습니다. 그 논문에서 나는 과학 활동이 두 가지 근본적인 가정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우리가 첫째,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둘째, 우리 자신의 진술들이 (우리가 이 실재를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할지라도)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한 실재에 준거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논문을 발간하고 나서 몇 달 후에 내 견해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는 물리적으로 특정한 색채와 비둘기들의 망막 신경절 세포들의 활동들 사이의 명확한 상호관계들을 발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발견을 알리고 동료들과 토론했을 ..
저기 당신이 보고 있는 저 동물은 말이다. -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이 말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나는 그것 속에서 말의 특징들을 인지하기 때문에 그것이 말임을 안다. -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인지한 그러한 특징들이 말의 특징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나는 그것들을 다른 말들 속에서 보았기 때문에 안다. - 그렇다면 말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말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사람들이 말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동물들의 특징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말이라고 부르는 동물이다. - 하지만 그것은 순환 논법이다. -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가 인간으로서 작동하면서 자기 자신의 체험 영역 속에서 구분의 타당화를 구성하는 순환적인 작동의 드러남이다. 1. 이 형이상학적 태도에는 어떠한 존재론적..
이것은 무엇인가? - 탁자이다 - 이것이 탁자라는 걸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 나는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탁자라는 걸 안다. - 그럼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는가? - 나는 그것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으며, 나는 거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1. 이 논증은 선험적인 설명적 원리 위에 서 있다. 이 원리는 어떤 것이 구별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관찰자와 독립적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관찰자와 독립적인 것은 그것이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러한 논법은 나의 외부에 내가 '하는' 것의 토대인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 위에 서 있다. 여기에는 이러한 진술을 타당하게 하는 추론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빅토르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집단죄의식에 대한 생각을 항상 단호하게 거부하고 비판했지요. 저는 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집단이라는 걸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집단이 어디에 있나요? 집단과 악수하고 포옹하고 같이 앉아서 어떻게 지내냐고,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왜 웃고 왜 웃는진 물어 볼 수 있나요? 집단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방해하는 그런 개념일 뿐입니다. 집단이라는 개념을 개인으로부터 추상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집단 혹은 어떤 외적 폭력의 희생물이 아닙니다. 사람은 제가 볼 때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입니다. 제 견해로는 뭔가를 추종하고 자기를 거기에 복종시키는 사람 조차도 그렇게 하게끔 스스로 결정을 내린 개인입니다. 한 때..
2차 수준의 개념을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맹점에 대한 실험을 생각해 봅시다. 한쪽 눈을 별에 고정시킵니다. 그래도 검은 점은 보입니다. 그러나 눈으로부터 일정 정도 멀어지면 검은 점은 사라집니다.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생리학적 설명에 따르면, 검은 점은 일정한 거리에서 망막의 특정 지점에 맺히는데 그곳에는 신경세포가 없고 그 지점은 시신경이 모여서 눈을 떠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리학적 논의를 가지고서도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왜 사람들은 맹점을 보지 않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맹점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시야(보이는 영역)는 우리에게 항상 닫혀있는 것(폐쇄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볼 수 있는 것만 보니까) 볼 수 없는 곳이 없는 듯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