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모델은 커뮤니케이션이 전송자로부터 수신자로의 단순한 정보 전달로 파악돨 수 있음을 분명히 하는군요. 또 있습니다. 이러한 모델의 틀 안에서는 정보라는 것이 물상화됩니다. 정보는 관을 통해 넘겨질 수 있는 물질이나 상품으로 나타납니다. 일찍이 이런 개념 틀이 출현했을 때 저는 상당히 당혹스러웠습니다. 40년대 말에 클로드 섀넌과 워런 위버는 이라는 아주 중요한 책자를 냈는데 그 책자에서 그들은 (원거라 통신기술의 모델에서 비롯되는) 정보의 믿을 만하고 정확한 전달 (전송자로부터 수신자에 이르는)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들의 천재적이고도 환상적인 사고는 커뮤니케이션의 프로세스에 대한 일련의 왜곡된 관념을 형성했습니다. 이미 그 당시에 저는 그들에게서 정보라 불리는 것이 원래는 하나의 신호에 지나..
스님의하루 2020.4.15 온라인 수행 법회 8주째 “겸손과 비굴의 차이” “겸손한 것과 비굴한 것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정말 상대방에게 숙이고 겸손했다면 상황이 끝난 뒤에 번뇌가 생기지 않나요?” “겸손이란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빨간 색깔도 있고 노란 색깔도 있고, 좀 빨리 가는 것도 있고 천천히 가는 것도 있어요. 이렇게 다 다르지만 세상 만물은 기본적으로 각자 다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다 평등합니다. 얼굴이 검든 희든, 남자든 여자든,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나라 사람이든, 사람은 평등합니다. 이처럼 세상 만물을 ‘평등’하게 볼 때 저절로 겸손해집니다. 반면에 ‘피부색이 흰 건 좋고 검은 건 나쁘다. 남자는..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이번 대담 초반에 당신은 사이버네틱스의 근본원리로 순환적 인과성을 기술하고 모든 인식의 순환성을 강조 했으며 사이버네틱스의 사이버네틱스의 윤관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차 수준의 자기연관적인 진술들을, 금지하는 게 아니라, 허용하는 새로운 논리학의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줄곧 문제가 되었던 것은 순환성이라는 아이디어와 그것의 결과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어었습니다. 완벽하군요. 사이버네틱스와 순환성에 대한 우리의 대담에 대한 참 멋진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론은 끝이 아니라 다시 하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어떤 궁극적인 결말로 나아가기 보다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될 겁니다. 시간은 항상 함축적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금언을 보세요. '만물은 유전한다.' 그리..
그런 생각을 하는 재능 있는 사람들의 오류는 뇌를 이해하기 위한 더 나은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된 것은 뇌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뇌에 대한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래 우리는 뇌를 파악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설명하고 스스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론의 구조는 스스로를 기술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상징화시켜서 말하자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인 우로보로스와 같습니다. 여기서도 순환성이라는 현상이 다시 등장합니다. 사실 저는 유럽의 학문전통을 익힌 채 미국에 도착해서 초기 사이버네틱스학자들과 공동작업을 할 때 순환성이라는 개념 틀이 인식이론적 관점에서도 근본적이고 매우 광범위한 결과를 낳게 될 것..
제 생각에 사이버네틱스적 사유의 근본 원리는 순환성에 대한 이념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거기로부터 우리는 생각을 진전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토대입니다. 순환성의 원리는 만약 우리가 그것을 끝까지 그리고 깊이 있게 생각해 나가고 또 그것을 인식이론적인 물음들과 연결지으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금지된 영역에 발을 들여 놓게 되며 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죄악시되는 자기연관을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순환적인 인과성의 결과를 완전히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제가 전에 순환성이 사이버네틱스에서 본질적인 것이고 우리는 이 원리를 좀 더 근원적으로 탐구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저는 단선적 인과성을 해체시키는 논쟁의 새로운 차원에 대해서 썼습니다. 자신의 배를 안전..
만약 하나의 사건에 대한 유일하고 모두에게 타당한 해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관성 명령이 토대를 상실하게 되네요. 왜냐하면 어떤 진술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정짓기 위해서는 하나의 해석에 대한 합의가 적어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어야 하니까요. 어떤 사태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을 직업성격으로 갖는 언론인들에게 당신은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요? 그에 맞는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저는 장래의 언론이들에게 강연을 하기위해 그곳에 갔었습니다. 학과 건물을 들어서면서 저는 문 위에 금언이 적힌 것을 봤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라Tell it as it is!' 저는 들어가서 제 강연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그 문장을 보고 기뻤습..
그러면 가령 하나의 똑같은 대상을 기술하는 하나의 똑같은 진술만이 있는가 아니면 다만 그런 대상에 대한 다양한 표현법과 견해들과 관련이 되는가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제 생각에 패러프레이즈(덧붙이는 말paraphrase, 해의) 조차도 같은 것을 기술하지 않습니다. 일리노이 대학에 근무했던 제 동료중의 한명이 거의 믿을 수 없는 실험을 했는데 그 실험은 어떻게 외관상 하나의 똑 같은 관찰이 말로 옮겨지는지,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200명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건을 특징짓도록 부탁했습니다. 강의실을 가로질러 놓인 긴 끈 한쪽 끝에는 큰 공을 반대쪽 끝에는 작은 공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큰 공을 들고는 작은 공에 날아가 부딪히게 했습니다. 이게 일어난 일 전부였습니..
그렇게 보면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더 이상 자체적으로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늘 순간적으로 결정된 현상 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변동하는 상호작용과 만남의 결과이네요. 유일한 상수는 변화뿐이네요. 맞습니다. 늘 변동과 운동이 지배합니다. 자기라는 개념은 순환성의 가장 협소하면서도 최종적인 게임형식입니다. 그것은 자아의 순환성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 예사롭지 않은 자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제 대답은 '그것은 끝없는 성찰의 성찰의 성찰이다'입니다. 자아란 자신에 대한 무한한 (끝없는) 성찰의 고유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쉼 없는 운동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심리학자들이 환자들에게서 정체성 위기를 진단할 때 자주 언급하는, 정태적으로 파악되는 정체성에 대한 관념과 구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