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부연설명으로부터 우리가 얘기하던, 세계와 묶여 있음을 강조하는 태도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저 반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제 주장은 우리가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가 아니면 세계와 묶여 있는가 하는 물음은 원칙상 궁극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런 물음을 결정할 수 있는 실험을 발명한다면 제게 편지를 보내 주세요. 하지만 저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두 가지 태도 중에서 하나로 결정을 할 수 있을 뿐이고 그리고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당신의 윤리적 입장을 근거 짓는 문제도 아주 멋지게 해결될 듯한데요. 우리가 세계와 묶여 있다는 입장으로 결정을 할 경우 그러한 결정 자체가 근거가 되고 토대가 됩니다..
스위스의 작가긴 아돌프 무쉬그의 책에서는 '병이란 규범을 의심하는 건강한 반작용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인용은 정말 탁월하게 어울리는 군요. 왜냐하면 그 인용은 질병과 건강이 정태적인(고정된) 크기를 갖는 게 아니라 둘 간의 특정한 연관체계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비판가의 관점에서 드러내 주니까요. 저는 질병, 건강, 치료 등의 개념들의 명확성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누군가 건강에 대해서 말하면, 또 치료 혹은 (뉴에이지 추종자들 사이에서처럼) 치유라는 개념이 등장하면, 곧바로 병에 대한 생각이 도입되고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이 암묵적으로 병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가족 치료학자로 일하는 제 친구들에게 늘 제안합니다. 치료라는 개념 자체를 버리고 아픈 사람에 ..
뉴에이지운동에서 그런 (묶여 있음의) 이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세계와 묶여 있음을 느끼는 것은 세계, 우주, 천체에 녹아드는 것과 같은 그러한 신비적 체험에 대한 묘사에서 보게 되는 표상이기도 하니까요. 제게는 그러한 신비적 체험들이 결코 신비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그런 체험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도 일상적인 그런 체험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지나쳐 버리는, 중단 없이 진행되는 세상의 수수께끼와 기적을 지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소위 신비가에게는 일상의 삶이 놀라운 것도 아니고 기적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신비가는 ..
베른하르트 푀르크센 : 다른 사람 그리고 살아 있는 것들과 묶여 있음에 대한 그러한 생각을 고찰하고 작금의 담론에서 그런 생각이 위치한 곳을 찾아본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뉴에이지진영에서 그런 생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는 지금 일종의 연결신학이 생겨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방종교라고, 영성과 과학으로부터 발전된 것인데 관계에 대한 숭배를 확고히 하고자 합니다. 하인츠 폰 푀르스터 : 그것은 우상숭배의 문제이며 어떤 가르침 혹은 특정 인물에게 스스로를 종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벗어버리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낙담 혹은 실망의 끝이자 자신의 길을 의식하는 노력의 끝입니다. 물론 우상이나 지도자 혹은 위대한 사상에 매달리는 게 훨씬 편하겠지요. 더 이상 ..
물론 많은 놀라운 일들이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눈에 띄지 않는 크고 작은 영웅적 행동도 또한 있습니다. 세상 여러 부분에서 살인을 목격할 경우 우리를 사로잡는 놀라움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많은 선행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다소 완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사람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각자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서 있는 구체적 상황에서 우리는 대체로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전부입니다. 인간은 단지 자기에게 부여된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세계 속에서만 행동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발명품 259)
제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물음을 결정할 때면 언제나 형이상학자들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렇게 명명하고 안하고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존재의 흐름 속에서 영원히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논리적 구조나 관찰할 수 없음 등으로 인해서) 분명히 설명이 되지 않는 결정할 수 없는 물음을 계속 반복적으로 결정합니다. 누군가 과거에 대해서 얘기할 때조차도 그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서술에 표를 던집니다. 그는 사실이 어땠는지 모릅니다. 그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만 알뿐이지요.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얘기할 때 우리는 늘 우리의 구성물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모든 역사 그리고 과거의 모든 사건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저는 비밀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밀이란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드러날 답을 갖추고 있을 때 비밀이니까요. 그에 비해서 제가 말하는 결정할 수 없는 물음은 원칙적으로 풀 수 없는 물음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새로운 표현을 발명해내개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언어적 형식을 유지하렵니다. 결정불가능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결정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선택을 하도록 요청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결정 가능한 물음이란 (어떤 선택 혹은 결정을 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틀을 통해, 보기에 따라서는, 이미 결정된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냥 미리 주어진 게임규칙에 맞추어 대답을 찾으면 되니까요. 저의 형이상학적 준칙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