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봅니다. '아니, 나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객관적 실제의 모습이야'라고 말합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사람도 꿈속에서 보이는 세계가 현실이라고 장담합니다. 꿈에서 깨어나야만 그때까지 꿈속에서 헤맸다는 걸 알게 되듯이, 안경을 벗어야만 그때까지 안경을 끼고 살았음을 알게 됩니다. 상에 집착했을 때 '내가 지금 상에 집착하고 있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상이 상 아닌 줄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상이 상 아님을 알고, 상이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함을 알면 그때 비로소 세계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지금 사로잡힌 생각에서 벗어나 '내가 정말 내 식대로 사람을 보고, 내 식대로 세상을 봤구나!'하고 알게 되면 참회와 기쁨의 눈..
제일 법회인유분 이와 같음을 내가 들었사오니,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제이 선현기청분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꿇으며 합장하고 공경하사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두호하여 생각하시며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
1. 개체발생이란 조직을 잃지 않은 채 겪는 구조변천의 역사다. 개체의 구조변천은 매순간 일어난다. 이것은 주위환경에서 온 상호작용이 유발한 것일 수도 있고 개체가 지닌 역동성의 결과일 수도 있다. 세포라는 개체는 환경과 끊임없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언제나 자기 구조를 바탕으로 '바라보고' 처리한다. 이때 구조도 세포의 내부 역동성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따라서 개체의 개체발생적 변천이란 그것이 해체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보편타당한 결론이 나온다. (앎의 나무 89) 2. 완벽하군요. 사이버네틱스와 순환성에 대한 우리의 대담에 대한 참 멋진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론은 끝이 아니라 다시 하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어떤 궁극적인 결말로 나아가기 보다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될 겁니다...
모를 뿐 다를 뿐 다만 할 뿐
당신은 지금 어떤 특정한 이념을 멋진 방법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사람(인식하는 사람)의 개인적 신념에 대해서 말하고 있군요. 그렇지만 일단 이 사람도 내가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순간 위험한 동물이 됩니다. 또 진리에 점차적으로 혹은 점근적으로 다가간다는 주장 역시나 제게는 좋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역시 어디에 최종적인 목표가 있는지에 대한 앎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진리를 지시하는 일)을 믿음(믿음이라는 생각)으로 대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어원을 분석해 보면 진리의 영어 단어인 Truth는 믿음을 뜻하는 독일어Treu로 되돌아가니까요. 진리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믿음으로 파악하게 되면 외적인 준거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
나는 모른다. 그러니 연구한다. 깨달음이 끝이 아니다. 수행에는 끝이 없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