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견해의 차이점과 대비되는 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인과관계라는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군요. 로렌츠의 주장에는 (관찰자가 아니라)환경에 우위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인과관계로 보자면 환경은 경험의 원인이고 그 결과가 점진적 인식의 확장을 통해서 실제적인 세계와 같아지는 적응인 것이지요. 당신은 이런 작용관계를 뒤집고 있고요. 그래서 유기체의 경험이 우위를 점하고 관찰이 원인이며 표상의 총체인 세계의 성립은 그 결과인 것이지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썻던 아주 짧은 연극한토막이 설명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연극은 관객이 있는 극장에서 행해집니다. 갑자기 멋진 붉은 막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무대로의 시야가 열리지요. 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 한 여인과 한..
확실성에 대한 집착으로 생긴 일에 참회한다면. 죄가 있어 죄를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할 게 아닌데 집착한 나의 분별에 대한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생긴 일에 대한 참회는, 죄가 아니라 어리석음에 대한 참회다. ['내가 옳다', 이 확실성의 유혹을 둘러싼 근본요인들을 성찰해보아야한다] 죄라는 건 자연상태에선 존재하지 않는다.[죄무자성] 죄는 인간이 인간을 인식하면서 생겨났다.[종심기] "성경에 씌어 있듯이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바람에 다른 존재로 바뀌어버렸고 다시는 처음의 무죄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타락'하기에 앞서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벌거벗은 몸을 통해 나타난다. 벌거벗고 돌아다닌 그들은 그냥 안다..
아름다운 사람은 계속 보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닮고 싶어진다. 그 아름다움이 외면 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미치려면, "그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어떠한 불일치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득하고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생산하고 명확하게 하는 체험들을 낳기 위해서 말입니다. " 예를 들어 의 박새로이와 그의 아빠 "퇴학을 당하더라도 무릎은 못 꿇겠다?" "그게 제 소신이고... 저의 아버지 가르침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멋지네요." "소신대로 행동했다고 책임도 지겠다고 하니... 제가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없겠습니다. 회장님." "퇴사하겠습니다, 회장님." 2. 미..
선생님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그들을 초대한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초대라고 하는 것은 신속한 행동이 요구 될 때에는 커다란 맹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상 정당하게 거절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률을 공포하고 규범을 정식화하는 사람들은 속도라는 엄청난 이득을 봅니다. 필요한 권력이 주어지면,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신속한 통제를 획득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목적들과 의도들과 관련해서 그들을 신속하게 정렬시킵니다. 어쩌면 초대들은 때때로 솔직히 너무 늦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일 수 있을까요? 자유의 황홀한 이점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슬에 묶어야만 할까요? 폭력을 거부하라고 우리가 사람들을 강제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접근법은 ..
이러한 식으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믿음들과 확실성들의 결과들이 우리에게 큰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이 결과들은 우리에게 어떤 인식을 강제하는데, 우리는 성찰을 통해 이 성찰이 부적절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확실성이란 그것들의 결과들이 관계되는 한에서는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말이군요. 그것들의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안적 방식들을 보이지 않도록 만드니까요. 만일 그것들이 단지 순간의 덧없는 확실성들로서 표면화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매우 강력한 어떤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들고 모든 진전된 성찰을 시간낭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어떠한 되풀이되는 성찰 노력의 유일하게 가능한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사실상..
앎의 앎이 우리를 얽어맨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하는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폭탄을 쓰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 가령 폭탄을 쓰는 선택을 하고 그 책임을 지지 않는 태도는 우리가 산출하는 세상을 아찔하게 만들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 선택이 망설여질 때는 책임지기 싫어서일 때다. 선택으로 손해본다면 그 책임을 감수하기 싫어서. 때론 어떤 선택이 나에게 이익이 될 선택인지 모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땐 기꺼이 책임질 자세를 견지한다면 담대하고 서슴없이 행동할 것이다. 1.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데, 앎을 모른는데 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앎이다...
부실공사는 앎의 앎을 무시한 무책임한 행위. 이렇게 공사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걸 아는 앎의 앎을 방치할 때 발생하는 세상은 아찔하다. 이해를 이해하는[앎의 앎]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다. 바로 내가 구분을 하고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는 걸 알면, 이 앎의 앎은 책임감을 통감한다. 1. 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
T. 갈등 앞에서,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은 것은 내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가진 확실성이 진리의 증거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이다.[앎의 앎] 내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로서 상대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다를 뿐 . 다름이 다툼이 되지 않기위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야한다. 내가 맞추든, 서로 맞추든 존중과 이해 영역으로. 만일 상대가 확실성의 유혹에 벗어나지 못할 때는. 이를 알아차리고 방책을 마련한다. 말하자면 거기에 맞춰서 지혜롭게 행동한다. 때론 맞서 싸우는 것이 윤리적 행동이 될 수도 있다. 공존을 위해. 1. 앎의 앎은 확실성의 유혹에 대해 늘 깨어 있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또한 우리가 가진 확실성이 진리의 증거가 아님을,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