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므로 완전과 불완전은 실제로 사유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동일한 종(種) 또는 유(類)에 속하는 개체를 서로 비교함으로써 보통으로 지어내는 개념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앞에서 (제2부 정의 6) 실제성과 완전성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 스피노자, 제 4부 서론에서 2. 색즉시공色卽是空 - 3. 뭇 생명 모두가 그 모습 그대로 부처 분별된 모습들을 만들지만 그 모습에 머물지 않고, 머묾 없이 흐르지만 끊임없이 분별상을 만들면서 앎과 기억으로 작용하는 것, 이것이 마음이 된 인연의 작용이며 인연이 마음이 되어 나타나 실상입니다. 더구나 분별된 모습마다 그 모습 그대로 인연의 총상이 되고 인연 그 자체가 되니, 분별된 모습이 시공간의 한편을 차지하여 다름만으로 존재..
작용하거나 작용하지 않거나 마음은 그 상태로 이미 특별한 상태입니다. 이 마음을 다른 상태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인연의 의지를 넘어섭니다. 인연의 의지를 넘어서려는 마음결은 거친 파도를 일으키니 스스로 쓸데없이 번뇌를 만드는 것과 같지요. 마음으로 들어나는 인연은 인간만의 인연도 아니며,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도 넘어서는 인연이기에, 인간으로 살아온 자취로 인연을 재구성하여 알아차리는 우리의 의식으로는 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때문에 경계가 뜻대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번뇌를 만드는 마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뜻대로 나타난 듯 보이는 경계조차 인연 따라 흐르니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어, 잡으려는 마음이 번뇌를 만드는 마음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뜻대로 된 듯해도 기쁨으로 들뜨지..
분별은 앎과 기억에 의해서 형성되고, 형성된 기억은 다음 분별을 기억에 맞게 재구성하는 바탕이 됩니다. 재구성의 바탕이 된 기억, 곧 분별하여 기억으로 남게 되는 일반상은 이름을 갖습니다. 이름을 지어 부르면서 이름에 맞는 이미지를 상속시켜 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서 이름만으로의 이미지에 머물게 되고, 머물게 된 인상印象은 그 밖의 인연 관계를 배제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름이란 타자를 배제하는 것을 속성으로 삼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타자가 배제된 이름만으로의 자기 이미지를 갖게 되면서, 인연이 만들고 있는 분별과 분별을 통해 나타나는 분별없는 앎이 분별만으로 존재하는 분별상이 되고 맙니다.(정화스님, p231) T1000.0 : 마뚜라나의 책 에선 세계는 언어 속으로 출현한다고 밝힌다.(관련글 본 블..
따라서 경전이 제시한 진리 체계를 분별된 언어상으로 갖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몯느 언어의 분별 체계를 되돌아보고, 매여 있는 분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경전이 제시하고 있는 가르치므이 본 뜻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살펴 아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마음 살핌을 넘어설 수 없으며, 마음 살핌이 중요하다고 해도 무상한 인연에 온전히 수순한 살을 사는 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씀 하나하나가 분별된 모습에도 걸리지 않고 분별을 떠난 못브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인연마다 온 삶으로서의 자기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경전이 가리키고 있는 진리입니다. - 정화스님, p209 T1000.0 :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비트겐슈타인..
그러므로 분별되는 모습이면서도 분별된 모습을 떠나 있는 '모양 없음(무상'을 아는 것이야말로 머물지 않는 지견으로, '모양 없음'이라는 이미지조차 갖지 않는 지견입니다. 언어가 갖는 분별의 일반상으로 지각된 것들을 파악하는 인식 근거가 바뀐 것입니다. 분별하여 상상을 만들면서도 상에 머물지 않고, 상을 허물면서도 상이 없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게 인시그이 근거가 전환된 것이지요. 인식의 근거를 전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경전이 쓰여진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정화스님, p208 T1000.0 :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이른바 내가 옳다는 생각이 틀릴 수 있다[無常한 변화속에 있으니]는 것을 언제든 인정할 열린 마음, 반증가능성의 철학과 회통한다.
이는 에서 "밖으로는 인식 대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잘 분별해 알면서도, 안으로는 '차별을 떠난 진여 공성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p60) 안팎으로 헤매지만 않으면 삿된 견해인 분별의 두 극단을 떠날 수 있네. 밖으로 헤매는 것은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며, 안으로 헤메는 것은 빔(공)에 집착하는 것이지. 그러므로 밖으로는 모양을 보되 모양을 이루는 연기법의 공성을 알고 모양에서 모양을 분별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떠나고, 안으로는 빔을 보되 빔 속에서 인연 따라 모든 것들이 성립되고 있는 것을 알아 빔에서 빔을 집착하는 마음을 떠나야 하네. 이것이 안팎으로 헤매지 않는 것이네. 이와 같은 법을 깨달은 사람은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릴 것이니, 비로서 세사에 나왔다고 할 수 있지..
법계의 무상한 흐르을 이루는 생명들(法)에게는 빠르고 더딤이 없으나, 법계의 무상한 흐름을 보는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둔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뜻합니다. 하나의 현상이면서 동시에 앞선 것을 허문다는 데서는 빠르고 더딤으로 나타낼 수 있는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영리한 마음이며, 흐름을 보편적이며 동일한 것의 상속으로 파악하는 분별은 흐름에 깨어 있지 못한 둔한 마음입니다. 둔하다고 하는 것은 변화에 둔감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영리하다는 것이 미세한 변화에 항상 깨어 있어 변화의 하나하나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흐름에서 보면 '잠시도 머묾 없는 현재'와 '차이를 알아차리는 앎'이 함께하기 때문에, 안다는 특성에서 보면 영리한 것 또한 시공간의 상속을 전제..
따라서 수행한다는 것이 마음을 닦는 것이지만, 마음을 특정한 상태가 되도록 닦는 것일 수 없습니다. 특정한 것 또한 분별상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묾 없는 앎의 본질인 인연 그 자체가 되는 마음을 걸림없이 쓰는 것이 수행입니다. 형성된 기억을 좇거나 습관이 된 마음결을 따라 패턴화된 의식의 통로를 따르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 알아차리면서 보고 아는 현재의 앎이 인연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인연 따라 걸림 없는 마음 길을 가는 것입니다. - 정화스님, p179 T1000.0 : 수행修行은 행을 닦는 것인데, 이를 에 나오는 홈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에 대비해 보면 행이 '형성된 기억을 좇거나 습관이 된 마음을 따라 패턴화된 의식의 통로' 즉 홈패인 공간에서의 행을 닦아내 '인연 따라 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