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프리드버그의 을 읽어보셨습니까?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그 책의 제1장 첫 문단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림과 조각에서 성적인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림과 조각을 부수거나 훼손하고, 입맞춤하기도 하며, 그 앞에서 울부짖고, 그것들을 향해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또 그것들 때문에 마음이 진정되거나 동요되기도 하며 저항하도록 선동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통해 감사를 표하고, 고양되기를 기대하며, 감동을 받아 가장 극대화된 공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요점은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지는 항상 강력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만약 '미술계'가 이미지에서 멀어진다면 미술계..
1. 구조적 결정론 '폐쇄적이고,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인 우리가 조화로운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체계들이 구조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하나의 외적 작용체는 체계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변화는 섭동하는 작용체에 의해 유발되지만 섭동 체계의 구조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외적 충격이 체계의 조직을 파괴함으로써 체계를 분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체계들이-구조적 변화로 인하여-접촉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체계들은 어떤 응집 형태를 보존함으로써 계속해서 상호작용을 할 수 있고, 자신들의 조직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호작용의 최종 형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함으로 138..
1. 心의 구조, 업식 업식은 오온 (五蘊皆空) 일체유心조/ 구조적 결정론 오온: 色受想行識의 과정이 순환하여 쌓임. 우리의 존재와 행위와 인식이 언제나 함께 얽혀있음. 2. 본다는 행위는 "마치 '사실'이나 물체가 저기 바깥에 있어서 그것을 그냥 가져다 머리에 넣으면 되는 것처럼 인식현상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늘 새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려는 모든 것의 근본이다."(앎의 나무 33) 요컨대 본다는 행위가 곧 '일체유심조'인 것이다. 모든 것의 근본이다.
기관에서 기관없는 신체를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욕망하는 기계. 하인츠가 말하는 단순하지 않는 기계. 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기계가 공하다는 것이 부각된다. 기계는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연결되어 있으며 작동한다. 나의 경우, 불교에선 나의 작용을 오온으로 설명하면서 오온이 공하다고 말한다. 이를 종합하면 오온은 무아로 작동한다. 실체는 없으며 작용은 있다. 오온의 작용은 있으나 나라는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위의 예처럼 우리를 기계로 표현할 때 기계는 작동 조건과 연결되어야 작동하도록 구조적으로 결정되어있다. 나는 나라는 실체가 있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조건과 만나야 움직이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 단순하지 않는 기계는 무아의 서구적 표현이 아닐까. 기계와 인간의 차이중의 하나는 자기인식이 아닐까. 기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