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내부와 외부는 이름 뿐이지 그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별을 내려놓아라'할 때는, 외부와 내부의 분별이 이름 뿐이지 그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렇다. 허나 이것이 분별을 거부하라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도 아님을 주의하자. 이름 뿐일 뿐/존재하지 않는 이중보기를 통해 집착하지 않는 게 핵심. 환상처럼 보기. 가령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 분별을 내려놓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옳고 그름을 내려놓는다고해서 내 생각이 틀리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틀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옳다는 확실성을 고집하지 않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와 똑같이 상대도 옳기 때문이다. 다만 다를 뿐이지, 너는 맞고 나는 틀린 게 아니..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상호작용 이론이군요. 체계들의 근본적인 자율성과 모순되지 않고, 또 필연적으로 어떠한 종류의 환원주의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론 말입니다. 내가 선생님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라면, 서로 다른 영역들과 그 영역들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의 구분을 유지하는 것은 환원주의 게임- 이것은 정말로 다름 아닌 저것일 뿐이다-을 벌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체계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관계들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지각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그것들이 결코 상호작용하는 체계들의 내적 특징들과 독립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의 대화를 녹음하고 있는 녹음기를 한 번 보세요. 그것은 탁자보가 덮여져 있는 탁자 위에 있습니다. 당신이 오늘 저녁 그..
폐쇄적 신경체계의 구조적 결정론의 마주침에서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합치의 정도가 증대됩니다. 그러나 이 상호변화는 구두가 규칙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빈도로 사용된다는 것을, 그리고 구두를 더 잘 신도록 우리를 끌어들이는 어떤 편안한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함으로 134)] 순환적 상호작용의 중요한 조건을 강조하자면 서로를 '끌어드리는 감정'의 피드백이다. 이로인해 조화로운 변화가 창조된다. 그러면 섭동을 생각해보자. 상대에게 편안한 느낌, - 이 점이 중요한데 - 감정을 유발할 상호작용이 섭동으로 이뤄져야한다. 다시 말해 폐쇄적 신경체계의 구조적 결정론이 지시명령적 간섭이 불가능함을 명확히 하는 것과 대비해 섭동은 느낌, 감정의 교감을 이끄는 조화로운 변화를..
T. [합치의 정도가 증대됩니다. 그러나 이 상호변화는 구두가 규칙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빈도로 사용된다는 것을, 그리고 구두를 더 잘 신도록 우리를 끌어들이는 어떤 편안한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조화로운 변화들 - 이것이야말로 비밀의 전부입니다 - 은 체계들 사이의 반복적이고 순환[재귀]적인 상호작용의 단순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그 체계들의 조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호간의 구조적 변화들을 유발합니다.] 순환적 상호작용의 중요한 조건을 강조하자면 서로를 끌어드리는 감정의 피드백이다. 이로인해 조화로운 변화가 창조된다. 그러면 섭동을 생각해보자. 상대에게 편안한 느낌, - 이점이 중요한데 - 감정을 유발할 상호작용이 섭동으로 이뤄져야한다. 폐쇄적 신경체계의 구조적 결정론이..
T. 상호작용의 영역 속에서 관계 영역 속에 놓인 전체들로서 마주침. [우리의 만남들은 신경 체계의 내적 작동들의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곳[내적 작동들의 수준]은 분명 우리가 만나는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폐쇄적 신경체계의 마주침이 관계 영역 속에 놓인 전체들로서 행동. 나의 비유를 들자면 우주 속의 우주. 소우주들의 마주침의 장. 하나의 장. [우리는 내부적으로는 외로운 상태에 있지만, 우리의 마주침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함께 창조해 냅니다. 우리의 대화는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영역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1. '폐쇄적인 신경체계를 갖고 있는 한 명의 구조적으로 결정된 관찰자가 폐쇄적인 신경체계를 갖고 있는 또 다른 구조적으로 결정..
1. 선생님은 책임 있는 행위의 체험과 자유의 체험을 성찰의 수준에 위치시키는군요.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자유의 체험은 구조적 결정론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전망에서 놀람의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라는 생각은 분명, 우리가 모든 행위를 헤아릴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측하는 사람들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예상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인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상태들이 우리가 그 때 관찰할 수 있는 다른 상태들로부터 결과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생명체계들은 그것들이 비록 '구조적으로 결정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의미로 계산될 수 없습니다..
T. 1) [내 견해로는, 책임을 진다는 것은 주의함[배려함]과 마음 씀의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활동들과 우리의 욕망들은 성찰적인 방식 속에서 일치를 이룹니다.] 우리의 활동과 우리의 욕망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성찰적인 방식 속에서 책임을 지는 행위에 의해서. 우리는 이러할 때 자유를 체험한다. 가령 시험을 앞두고 우리도 놀 자유를 달라고 누가 말을 한다면. 시험을 잘 치고 싶은 욕망과 시험을 준비하는 활동이 일치할 때, 즉 책임 있는 선택을 할 때 찐 자유의 체험이 발생한다. 반대로 시험을 앞두고 놀고 싶은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욕구에 기초한 자유, 책임의 성찰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선택이 될 것이고 오히려 자유를 방기하는 결과를 낳는다. 문제가 되는 건 욕구에 기초한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