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유혹 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 영원히 지나간다. 이 순간을 영원히. 무시간성.
어찌됐든, 억세게 운 좋은지 알아라. 또, 일단 살아만 있다면 뭐든 별일 아니다.
비상식적인 사람과 대화하는 법 “평소에는 굉장히 상식적이고 말도 통하는 사람인데 통일, 정치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비상식적인 분들이 있어요. 이렇게 관점이 다른 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 사람하고 얘기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질문자가 마음을 닫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가 자기의 관점을 고집하는 겁니다. ‘저렇게도 볼 수 있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대화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나?’ 하고 물으니까 ‘기둥같이 생겼습니다’라고 답을 했어요. 그러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라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은 다리를 만져 봤구나. 다리는 기둥 같이 생긴 건 맞다.’ 이런 관점을 가지..
2021.12.12.(스님의.하루) 즉문즉설(卽問卽說)도 일종의 탐구의 과정입니다. 즉문즉설을 즉문즉답이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있는데, 즉문즉설과 즉문즉답은 다릅니다. 스님과 대화를 하다가 질문자가 ‘별 일 아니네’, ‘괴로울 일이 없네’ 이렇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즉문즉설이에요. 말씀 ‘설(說)’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설법을 뜻합니다. 반면에 즉문즉답은 지식을 갖고 답하는 거예요.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은 즉문즉답을 할 수 있지만, 인생은 답이 없습니다. 인생살이에 어떻게 답을 줍니까.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그 사람의 결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는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얘기를 해도 ‘그럴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결정해놓고 왜 자기가 ..
공하다, 선택이다.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