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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가 해로운 이유는 무지로 말미암아 삼독(탐진치)에 빠져 화를 자초하고 삶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1.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데, 앎을 모르는데 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앎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하는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우리는 흔히 이런 깨달음을 무시하거나 못 보게 스스로 억누르면서, 우리의 일상행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모든 일상행위는 빠짐없이) 세계를 산출하고 굳히는 데 이바지 한다. 우리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세계를 산출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 행위의 초월성을 보지 못하면, 우리가 부응하고자 하는 상(像)과 실제로 산출하는 존재를 혼동하게 된다 .이런 잘못은 오직 앎을 알아야만 고칠 수 있다.(앎의 나무 279)
2. 일체유심조
: 환상처럼보기
3.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의 불가능성
: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기
4. 무지와 복종 (미시파시즘)
"스피노자가 보여주고 있듯이, 모든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복종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문에 오류, 공로와 과실, 선과 악 등은 복종과 불복종에 관련된 단지 사회적인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사회는 사유 능력을 복종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사회, 오직 행위에만 적용되는 국가의 규칙에 그것을 종속시키지 않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이해로 삼는 사회일 것이다. 사유가 자유로운, 따라서 생동적인 한, 그 어느 것도 위태로워지지 않는다. 사유가 그렇지 못하게 될 때, 모든 종류의 다른 억압들 또한 가능해지며, 그것들은 이미 실현되어, 어떤 행위라도 유죄가 되고 모든 삶이 위협받게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 10)
당신은 이런 영역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것 같군요. 그런데 무엇이 선이고 참이고 미인지 당신은 어떻게 알지요? 그러한 앎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요?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를 그렇게 절대적으로 나눔으로써 얻게 되는 결과는 사람들이 자신을 재판관으로 승격시키게 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영원한 정의로 파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윤리적 상대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윤리적 상대주의가 논의의 결과는 아닙니다. 저는 다만 소위 보편적 절대적 타당성을 소유하고 있는 그러한 분별들이 당신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런 분별들은 결코 당신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런 분별들의 관철에 따른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명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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