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두 개의 구분되는 태도, 즉 생각하고 설명하는 두 가지 길들이 있습니다.[괄호 없는 객관성과 괄호친 객관성] 첫 번째 길은 괄호 없는 객관성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그렇다고 주장되는) 객체들이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진술들의 외부적 타당성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지요. 이러한 타당성은 권위와 무조건적 정당성을 '주장되는 것'에 넘겨줄 것이고, 그리하여 복종을 목표로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들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부정하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들에게 귀를 귀울이려 하지 않거나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근본적인 감정은 보편타당한 지식의 권위에 의해 힘을 받습니다. 상호배제적인 초월적 존재론들의 영역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각각의 존재론은 객관적 실재를 파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의 개성 및 행동들과 독립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65)
두 번째 태도는 나는 괄호 친 객관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의 감정적 기초는 다른 인간들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질문은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모든 시도가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길에 따르면 객체들과 존재의 체험 사이의 구분이 부정되지는 않지만 객체들에의 준거[참조]가 설명들의 기초는 아닙니다. 모든 설명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체험들 간의 정합성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자면, 관찰자가 모든 실재들의 기원이 됩니다. 모든 실재들은 관찰자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창조됩니다, 우리는 구성적 존재론들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모든 존재는 관찰자들의 '함'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존재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가 결코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고 무수한 가능한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실재들 각각은 완전히 정당하며 타당합니다. 물론 바람직한 정도는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변 인간들의 복종을 요구할 수 없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고 협력과 소통을 추구할 것이며,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 우리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간주하게 될 것인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주장은 만일 그것이 실재의 적절한 영역의 타당화 기준들을 충족시킨다면 참될 것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66)
2.
스피노자가 보여주고 있듯이, 모든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복종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류, 공로와 과실, 선과 악 등은 복종과 불복종에 관련된 단지 사회적인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사회는 사유 능력을 복종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사회, 오직 행위에만 적용되는 국가의 규칙에 그것을 종속시키지 않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이해로 삼는 사회일 것이다. 사유가 자유로운, 따라서 생동적인 한, 그 어느 것도 위태로워지지 않는다. 사유가 그렇지 못하게 될 때, 모든 종류의 다른 억압들 또한 가능해지며, 그것들은 이미 실현되어, 어떤 행위라도 유죄가 되고 모든 삶이 위협받게 된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10)
T.
#괄호친객관성 #환상처럼보기 #있음에서함으로
#움베르또마뚜라나
내가 보기에,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말하는 '괄호친 객관성'은 <금강경>에 나오는 '환상처럼보기'와 같은 맥락이다. 말하자면 객관성을 환상처럼 보는 것이다. (객관성)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환상처럼 보기'는 신체적이라는 것이다. 본다는 것, 앎이 바뀌면 내 신체의 반응도 달라진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
'instargra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욕망의 내재적 과정과 복리 (0) | 2023.04.06 |
---|---|
간절한 욕망 (0) | 2023.04.06 |
환상처럼보기와 거듭나기 지금 여기 (0) | 2023.04.05 |
부처의 신체, 거듭난 신체 (0) | 2023.04.05 |
평등에 관하여 (0) | 2023.04.04 |